바람을 맞고 있는 한 남자를 표현한 작품이 있다
공공장소에 영구 설치되는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잠시 스쳐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요즘 국내의 수많은 조형물이 작가의 세계를 엿보기 어려운, 개성 없는 작품들이 많은 게 안타깝다. 역사의 아픔을 표현한 소녀상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세워지는 것도 무척 아쉽다. 내가 하고 있는 그림자 작업은 어두운 공간에서 진가가 드러나기에, 지나간 역사에서 흐려지고 묻힌 이야기를 다시 조명하는 데 무척 잘 맞는다. 그런 작업을 구상하고 실현해 보려고 한다.
몰입은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일어나기 쉽고, 그때 느끼는 감정이나 만족감이 다른 것과 구분되기에 경이롭다. 몰입하여 인물을 만들 때 그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표정이나 몸짓에 집중한다. 그러다 그의 감정까지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느새 깊은 슬픔이나 충만함 같은 감정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렇게 빠져 있다 보면 서너 시간이 순간처럼 지나가 버린다.
그런 몰입이 TV 같은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것은 내가 지금 내적인 충만을 추구하고 있는가, 외부에 의존해 재미를 추구하고 있는가이다. 외적 환경은 수시로 바꿔주지 않으면 흥미가 떨어진다. 진정한 몰입이라 할 수 없다. 사실 TV에 빠져 있다 나오면 의미 없이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자책하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 작품을 만들지 않을 때는 책을 읽고자 노력한다. 작품에는 고도의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하기에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럴 땐 외부적 몰입보다 휴식이 좋다.
작품을 만드는 방식은 먼저 머릿속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를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적절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작은 모형을 만든다.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이 중요한데, 보통 나의 삶 속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별을 보다가, 아이를 보다가, 바람 부는 숲을 바라보다가.
가끔 작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기보다 저 멀리 있는 존재가 내게 화답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이미지가 확고할 때도 있다.
바람을 맞고 있는 한 남자를 표현한 작품이 있다. 그의 머리카락과 표정은 강한 바람에 시달리고 있지만, 두 눈을 감고 초연한 모습으로 바람을 마주하고 있다. 그가 내면과 소통하는 모습을 만든 이 작품은 어둠 속에서 더욱 확고한 형상을 만들어 내는데, 빛이 사라지면 형체 뒤로 궁극에 이르는 원이 나타난다.
거친 바람 속에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노인의 눈빛과 자세. 바람을 가슴 속에 품고 가는 사람의 거친 모습이지만, 그림자는 원을 그리고 있다. 원은 하나의 완벽한 세계이고 가장 안전하고 확장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러나 땅을 디딘 다리의 형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완벽이란 건 있을 수 없으며, 원을 지탱하는 선은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신의 바람’처럼 철봉에 두둥실 떠 있다 해도 원을 지탱하는 현실을 잊으면 안 된다. 완전한 세계라 하더라도 현실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마련이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꿈을 안고 가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일관되게 이상만 좇으며 살았다. 작품 ‘꿈을 안고 가는 사람’은 이상만이 유일한 현실인 것처럼 시선이 앞으로 향한다. 주위를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비슷한 주제로 만들었던 지난 작품보다 발전된 형태로, 내가 지향하는 모습이며 모든 수도자의 모범과 같은 형태다. 작품이 나의 현재 모습을 더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글/작품 안경진
안경진은 조각가로 현재 그림자와 여백을 통해 하나의 형태에서 여러 가지 형상이 빚어지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2004년 첫 번째 개인전 〈여행〉 이후 아홉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백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공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을 펴냈다.
인스타그램 @artin_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