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이 조용을 다하는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먼지가 보이는 아침 / 김소연
조용히 조용을 다한다
기웃거리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
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
나는 나대로
극락조는 극락조대로
먼지는 먼지대로 조용을 조용히 다한다
-시집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10월의 중순입니다. 아직 서머타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가을은 이미 눈앞에 왔습니다. 투어를 하는 날에는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에 손님들과 만납니다. 한창 여름에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인사를 했는데, 요즘에는 하늘이 어두울 때 첫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티칸 투어를 하는 날입니다. 선선한 날씨가 좋아서 평소보다 이르게 집에서 나왔습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습니다. 로마에서 생활을 시작했던 4월에 저런 하늘을 자주 봤습니다. 딱 반년이 지났네요. 그때는 봄의 하늘을 봤는데, 어느새 가을의 아침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침을 만끽하는 건 오랜만입니다. 사실 일을 하는 날에는 아침에 먼지를 볼 틈이 없습니다. 일어나면 씻고 나갈 준비나 하기 바쁘죠. 쉬는 날에는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밖에서 소음이 들리면 그 소리에 눈이 떠집니다. 조용한 아침을 맞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소란스럽지 않은 아침이 언제였을까, 기억을 돌이켜 봅니다.
오늘과 비슷한 하늘빛이었습니다. 로마에서의 첫날, 시차적응이 안 되어서 새벽 3시에 눈이 뜨였던 날이었습니다. 눈은 아까 뜨였고 정신도 이미 맑아졌지만, 룸메이트가 깰까 봐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창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흰색의 달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따뜻한 색이 되더니 붉게 타올랐습니다. 빛을 그렇게 오래 보고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던 날들엔 밝아지는 것은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낳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아침에 저는 숨을 죽이고 바라봤습니다. 한국과 로마에 걸쳐진 어중간한 모습으로 새벽을 지켜봤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저를 숨죽이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빛과 빛의 사이를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해는 해대로, 나는 나대로, 조용은 조용히 우리는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시인은 자다 깨어났을 때 이런 아침을 맞이했던 걸까요? 아니면 잠을 못 이룬 밤을 보내고 먼지가 보이는 아침을 만났을까요? 이 시를 쓸 때, 시인이 어떤 아침을 보았을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침의 풍경처럼, 시인이 보았던 아침도 깊은 곳에 혼자 담아두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첫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직 모임 시간은 한참 남아있습니다. 어머니와 딸입니다. 인사를 하고 안내를 드렸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모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요, 혹시 아침 안 드셨으면 근처에 카페 다녀오셔도 되고, 여기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그러자 피곤하지만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어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어제 도착했는데, 시차적응이 안 되어서요.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졌지 뭐예요. 그래서 일찍 나와 버렸어요.”
그날의 저와 같은 새벽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새벽 세 시에 눈을 떠서 무얼 하셨을까요. 잠이 든 딸을 깨우지는 못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을까요. 혹시 먼지가 보이는 아침을 느끼셨을까 궁금합니다.
먼지가 보이는 아침, 조용이 조용을 다하는 아침, 그 경계의 아침을 또 한 번 맞이하고 싶습니다.
글/사진 박무늬
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이 막막하고 의욕도 없어서 작은 카페와 독립출판사를 차렸다. 친구와 함께 첫 번째 책 『매일과 내일』 을 내고, 출판사 사업 신고한 것이 아까워서 두 번째 책 『오늘도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굽습니다』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투어가이드로 일했다. 현재 안산에서 '무늬책방'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