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Mar 31. 2017

물 같기도, 산 같기도, 그대를 스쳐갔던

니가타의 사케들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 국경 너머 설국 #3


"그 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말없이 그가 잔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조금씩 나눠 마시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도 니가타에 온 적이 있다. 한 번은 혼자, 두 번은 직조를 조사하는 일본선생님과. 혼자 왔을 때는 소도시를 이동하거나 도쿄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할 때 열차 안에서 각 지역에서 산 작은 컵사케를 비우는 것이 소소한 재미였다. 이제 막 방문한 지역에 대한 애정도 어쩐지 각별해지는 것 같고 혼자일지라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선생님과 방문했을 때는 조사를 마치고 생맥주를 마시거나 사케가 유명하다고 하여 이것저것 시켜보기도 하였다.
 
 어느 날 나라奈良의 작은 음식점에서 니가타의 사케를 발견했을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오래 전 친구를 마주친 것처럼 반가웠다. 기실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것도 아니면서 나는

 “선생님! 맛있는 사케예요! 이거 마셔요!”

하고 외치고 말았다.


 여덟 개의 바다가 있다는 산, '핫카이산八海山'이었다. 가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설산이 눈앞에 펼쳐진 듯싶었다. 사실은 가 본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아스라함마저 느껴졌다.

 니가타에 체류를 하게 되면서, ‘지역 사케’ 위주로 ‘1일 1사케’를 해볼까 하였다. 대개는 지켜졌는데 조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관찰을 더하니 일본에서는 ‘사케’라는 것이 ‘酒’, 즉 ‘술’을 통칭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대개 외국에서 sake는 우리나라 ‘청주’에 해당하는 12~15도 정도의 일본 주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쌀을 누룩으로 발효시킨 술은 니혼슈日本酒라고 불린다. 일본에서 ‘사케’를 좋아한다고 하면 ‘알코올, 술’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듣는다. 맥주도 사케고 와인, 소주도 사케인 것이다. 맥주 캔 하단에 쓰인 ‘오사케お酒’ 또한 다만 ‘술, 주류’라는 뜻인데, ‘오’가 붙었으니 ‘오 酒님!’의 느낌이라며 혼자 웃었다.


1일 1사케 실행 중.




 이러한 분류를 몰랐을 때, 알고 나서 속았던 느낌이 든 것이 ‘비-루’, 즉 일본의 ‘맥주’였다. 나는 술을 살 때 가격도 보지만 우선은 맛있어 보이는 것을 집어 드는 편이기 때문에 가격민감도가 낮은 편이다. 어느 날, 새로운 디자인의 맥주를 사왔더니 평소에 선호하던 브랜드의 맛이 아니고 날카롭고 짧게 혀를 쏘는 맛이 났다. 보통 입에서는 더 부드럽고 목에서 시원하게 쏘는데 어째서일까 하다가 일본친구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다. 삿포로, 기린 등 회사에서 맥주와 구분이 안 되는 디자인에 ‘맥아’의 비율이 현저히 낮거나1) 0인 술을 제조, 판매하는데 이를 ‘핫포슈(발포주發泡酒)’라고 한다는 것을. 가격은 맥주의 1/2 정도로 맥주 맛을 흉내 낸 주류인 것이다. 시원하면서도 가볍고 톡 쏘는 성격을 유지하면서 취할 수 있으며 가격은 낮춘 것으로, 대학생들이나 맥주 맛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 맥아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무엇보다 맥주가격이 부담되는 층을 노려 맥주와 나란히 진열해 나 같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여운이 없는 맛이라고나 할까.

 핫포슈는 부담 없는 맛과 가격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와, 재료비와 세금을 아껴 대량 판매로 수익증대를 꾀한 기업의 실리를 동시에 만족시켜 절찬 판매중인데 쌍방의 이득에서 소외된 일본정부가 세수증대를 위해 맥주와 핫포슈의 세금을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물론, 핫포슈의 세금을 올리는 쪽으로.


니가타 맥주와 연말과 겨울을 연상시키는 맥주. 이중엔 핫포슈가 섞여 있다.


 일본의 주류 판매대를 보면, 한국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다지만 기실 일본인이 더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맥주, 핫포슈 코너 뿐 아니라 소주, 니혼슈의 매대가 다양한 브랜드로 가득 차 있어 한 번씩 다 먹어보려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이다. 일본의 소주는 한국의 희석식 소주보다 도수가 높아 25도 정도2)가 주류主流이고, 지역을 대표하는 소주도 가격대별로 다양하다. 다만 맥주처럼 자국 생산만으로는 가격을 낮추는 데 한계가 있는지 ‘진로, ‘경월’ 같은 저렴한 소주를 포진시켜 적잖이 놀랐다. 특히 ‘경월’은 한국 내 부진한 실적을 일본 판매에 의존할 뿐 아니라 일본 기업 유통을 통해 부동의 이미지를 확보하였다. 맥주에도 저렴한 한국 맥주가 선보이고 있는데 한국산 술은 싸구려, 저렴한 술의 이미지로 고착되는 것이 아닌가, 애잔한 마음이 든다.


칵테일 소주 바람을 일으킨 경월소주.




 사케, 즉 ‘니혼슈’를 담그는 쌀은 밥으로 먹는 쌀이 아니다. 니가타의 사케가 유명하고 맛있는 것이 ‘고시히카리’ 쌀 때문이 아닌가 오인하기도 하는데, 사케 용 쌀이 따로 있으며 간혹 상징적으로 고시히카리와 사케 용 쌀을 섞는 경우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이다. 사케의 맛은 쌀과 물, 누룩 등의 원재료와 이것을 배합하거나 발효시키는 기술 - 대개는 전통 -에 좌우되는데 니가타의 사케는 겨우내 쌓인 눈이 녹은 맑은 물이라는 자연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유난히 긴 겨울 덕에 장기 저온숙성을 거칠 수밖에 없는 까다로운 기술이 축적되어 어느 곳보다 맑은 맛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는 쌀의 도정률, 즉 얼마나 깎아내 버리고 적은 부분만 남겼느냐에 따라 세세한 등급이 매겨지고 맛과 가격이 달라진다. 도정률이 높은 것이 소위 말하는 잡미가 없이 맑고 순수한 맛이 있으나 쌀의 60% 이상을 깎아내 버린 술을 보면 쌀 자체마저 다 없애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니가타에는 니가타 비어와 에치고 비어, 하카이산 비어 등의 지역맥주(지비루)가 있고, 삿포로Sapporo의 니가타 헌정 맥주가 있는데 삿포로맥주 창립 기술자가 니가타 출신이라고 한다.


올해 300주년을 맞이한 아오키 주조. 그곳의 신상품 雪男의 수송차가 보인다.


 니가타는 사케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눈을 쌓아 술을 저장하는 유키무로雪室의 ‘핫카이산八海山’, 조사지인 시오자와 역에서 몇 발자국 걸으면 있는 아오키 주조의 ‘카쿠레이鶴齡’가 유명하고, 니가타현의 ‘쿠보타久保多’, ‘고시노칸바이越乃寒梅’는 명실상부한 명주名酒이다. 체류하면서 새롭게 만난 술 가운데 시오자와의 타카치요 주조가 만든 ‘타카치요高千代’와 ‘마키하타卷機’3), 오지야小千谷의 ‘죠자자카리長者盛’, 나가오카의 ‘마츠노가와松乃川’와 ‘요시노가와吉乃川’, 니가타의 ‘고로五郞’가 가라쿠치辛口라 표현되는 경쾌하고 맑은 술이었다. 반면 슬림한 캔 사케로 유명한 ‘기쿠스이菊水’, 유자와湯澤의 ‘조젠미즈노고토시上善如水’는 아마쿠치甘味(감미)가 느껴지는 술로 술병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디자인과 마케팅 능력이 뛰어난 회사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눈과도 같은 하얀 자기瓷器병을 쓰는 ‘핫카이산八海山’도 디자인이 빼어나고, 컵 사케로는 같은 아오키 주조4)의 ‘유키오토코雪男’5)가 지역성을 잘 살려 전통을 유지하면서 젊은 층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극곰과 한 잔 하고싶어지는 조젠미즈노고토시上善如水 사케.


무이카마치六日町 눈축제에 등장한 매실주. 뜨겁게 데워져 눈축제와 어울렸다.


 니가타의 사케를 마시면 입부터 마치 어느 산 속,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골짜기가 되어버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시원하면서도 맑고 투명한 계곡물이 바위 사이로 흘러내려 사슴도 발을 담그지 않고 긴 목을 수그려 목을 축이고 다람쥐정도나 앞발을 찰박이는 물 같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흐르는 소리마저 없고 물조차도 보이지 않는 그런 물 같은 술이라 혹자或者는 “어, 이게 술이야?” 할 맛을 지녔다. 분명 경쾌하고 맑은 무엇인가가 공기가 아닌 무엇인가가 잔에서 그대의 입 안을 스쳐갔는데 말이다.


그러한 산이 없더라도, 저 높이 오르지 못했더라도 수도 없이 올랐던. 그대에겐 그러한 산이 있지 아니한가.




1) 맥아 함량 67% 미만.
2) 그러나 일본의 소주는 한국처럼 소위 ‘깡소주’로는 잘 마시지 않고 탄산음료나 얼음, 물 등을 섞어 마시는 편이다.
3) 마키하타는 마키하타야마(卷機山)를 지칭하는데 이 산에는 베를 잘 짜게 해달라는 염원을 들어주는 신사가 있다.
4)  올해 창립 300주년을 맞아 특별한 기념행사를 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5) 개인적으로는 이름도 그렇고 이 사케의 맛은 남성 취향의 느낌이 강하다. 설국 지역 설화와 스노우보드를 결합한 디자인으로 눈을 연상시키는 컵의 디자인은 여성에게도 어필하는 면은 있다.




글/사진 겨울베짱이

방방곡곡 베 짜는 조사를 하거나 직접 베 짜는 것을 즐깁니다. 눈을 좋아합니다.





여행 매거진 브릭스의 더 많은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http://www.bricksmagazine.co.kr/




매거진의 이전글 가라쓰 사카모토야 여관 술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