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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n 13. 2017

낮은 곳에서 봄을 보다

포천 한탄강 둘레길에서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 들에서 보낸 사계 #1


 봄을 맞는 농부의 마음은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의 마음과 같다. 방학이 다가와 좋기는 한데, 그 전에 시험을 치러야 한다. 방학이라 함은 추운 집구석을 벗어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시험은 일 년 중 가장 바쁜 봄 일을 말한다. 겨울만 되면 기상뉴스에 단골로 나오는 철원과 이웃한 포천 최북단은 매우 추운 지역이다. 자연스레 자세는 움츠러들고, 몸은 비대해지고, 마음은 나태해진다. 이 상태에서 노동 강도를 최고치로 끌어올려야 하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콩, 감자, 옥수수 등 밭에 씨를 심고 뿌리는 것은 애교라고 해 두자. 봄 농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모내기이다. 볍씨에 싹을 틔워 건강한 모를 만든 다음 때를 놓치지 않고 논에 심어야 한다.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반쯤 감은 눈으로 아침을 먹고 논으로 향한다. 집에서 나갈 땐 분명 어두웠는데, 한탄강과 딱 달라붙어 있는 냉정리 뜰에 도착하면 벌써 한낮이다. 아침 6시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일을 시작해 밤 8시에 일을 끝내면 겨울에서 여름까지 모든 계절의 날씨를 한 자리에서 경험한다.



 못자리(볍씨를 모판에 뿌리는 일)를 하기 전에,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듯, 봄의 기운을 얻기 위해 집을 나서 보기로 했다. 겨우내 붙은 찌뿌둥한 허리 지방도 덜어내 볼 겸. 창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은근히 유혹하는 봄 햇살을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집을 나서자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동시에 몸을 감쌌다. 순간 몸의 모든 신경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긍정의 마음도 살아난 건지, 농부의 존재 이유를 일깨워 주는 봄에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힘들어도, 황사가 심해도, 점점 짧아져 가는 봄을 사랑하자.





 삼룡이(트럭, 우직하게 일 잘하라고 지어준 이름, 아프지 말고)를 타고 비둘기낭 폭포(한탄강 6경)로 갔다. 이곳은 영화, 드라마 촬영장소로 매스컴을 타고, 한탄강 댐이 생기면서 포천시가 미는 관광지가 됐다. 기이한 모양의 주상절리가 동굴을 이루고 비가 오면 시원스레 떨어지는 폭포가 볼 만하다. 또 캠핑장이 생겨, 잘 이해는 안 가지만, 사시사철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목적지가 아닌 출발지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두 개의 둘레길을 걸을 계획이다.


비둘기낭 폭포


 남쪽을 향한 ‘한탄강 주상절리 길’을 먼저 걸었다. 길은 한탄강 바로 옆에 나 있어 강물과 보조를 맞추어 걸을 수 있다. 얼마를 지나니 주상절리가 강 건너편으로 보였다. 까마득한 옛날 북한에서 화산이 터졌고, 용암이 철원, 포천, 연천을 지났는데, 그 길이 지금의 한탄강이다. 당연히 한탄강 곳곳에는 용암, 강물,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상절리다. 기암괴석, 모래톱, 강물, 절벽에 자란 꽃과 나무가 만드는 풍경은 참 근사하다.


 위아래로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다리가 보였다. 작년에 완공된 크고 높은 신 영로교에 비해 옛것은 작고 왜소했다. 어릴 적 이 다리는 내게 세상의 경계였다. 어디든 걸어 다니던 시절, 이곳을 지나면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또 버스를 타고 다리를 넘으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넓은 세상을 만나고 돌아온 지금은 더 이상 크게 느껴질 리가 없다. 하지만 절벽 아래, 강 바로 옆에 난 길을 걸으니 작은 다리도 크게 보였고, 난 다시 시골 꼬맹이가 되었다.


한탄강 주상절리


한탄강


영로교와 신영로교




 영로교를 지나 운산리 생태공원에 들어섰다. 구라이골(한탄강 7경)을 지나 운산전망대에 도착하면 낫 모양으로 휜 강이 보인다. 이 아래로 한탄강변 데크 로드가 있어 강 바로 옆에서 눈높이를 맞추고 산책할 수 있다. 강과 산이 맞닿은 곳을 바라보다 ‘이 길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비교 대상을 알지 못해 깡촌을 깡촌이라고 생각도 못 한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이곳은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길보다 내가 더 그렇겠지….


운산전망대에서 바라본 한탄강


 오랜만에 하는 산책이라 다리가 아프고, 신음도 나왔다. 멈추고 싶은 순간, 한 광고 카피가 떠올랐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어른이 되고, 먹고 사는 일을 하면서 심장이 뛰는 일은 점점 안 하게 됐다. 틈만 나면 앉고, 누웠다. 그런데 이 한마디를 듣고서 숨이 턱까지 찰 때까지 뛰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웠고, 다시 그런 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늙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북쪽으로 난 ‘한탄강 둘레길’을 걸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 공사 현장이 보였다. 한탄강 위를 걸어서 지나면 낮은 산이 나오고, 또 하나의 다리를 지나면 중리벌에 도착한다. 이런 다리는 아래를 보는 아찔함도 좋지만, 어느 무리에나 꼭 하나씩 있는 겁 많은 사람을 놀리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장마철에 강물이 불어 사납게 흐를 때 겁쟁이 손을 잡고 뛰어가면 얼마나 아찔하고 재밌을까.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 지역 학생들과 함께 이곳을 걸을 상상을 하니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숲속을 지나는 길은 고요하기만 하다. 가끔 ‘후두둑’하며 날아가는 꿩 때문에 놀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 경험하니 익숙해졌다. 얼마 지나 나무 계단이 나타났는데, 옆으로 우뚝 솟은 가파른 절벽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코앞에서 보는 바위는 그 주름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큰 것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거대한 과거와 현재 앞에 서니 날로 높아지던 마음도 낮아져 제 자리를 찾아갔다.


나무 테크로 이어진 길


보는 이를 숙연케 하는 바위의 주름


 멍우리 협곡(한탄강 4경)에서 본 한탄강은 장관이다. 바위를 보면서 낮아진 마음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더 위대해 보였다. 강 건너편 절벽 위에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길은 대충 보기에도 3km는 족히 되는 듯한데, 숲속, 주상절리 절벽 위에 놓여 있다. 아직 입구가 완성되지 않은 듯하여 가보지는 못했지만, 곧 그 길을 걸어 볼 날이 오겠지. 오후가 되면 그늘이 지는 곳이라 언제든 걷기 좋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겁쟁이와 함께라면 금상첨화!



 여의도 벚꽃이 만개했다는데, 아직 이곳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봄이 왔나 싶은데 발밑에 풀들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땅 위에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 있었다. 어찌 보면 별 거 아닌 것들이 가장 먼저 겨울의 끝,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지난겨울 우리나라가 생각났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자 찬 바닥 위에 피어올린, 세상의 어떤 불꽃놀이보다 아름다운 촛불들. 작은 풀들은 어느덧 내게 별 것이 되어 있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봄을 보았다.


봄을 알리는 신호




글/사진 농촌총각

인생의 절반에서 새로운 기회가 한 번은 더 올 거라 믿는 농부. 좋은 책, 음악, 영화, 사람들로 가득한 문화창고를 꿈꾸고 있다. / mmb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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