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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퀸'의 실종

| Writer. 오드

by 아이돌레

‘썸머 송’이 사라졌다. 한때 여름이면 휴대전화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당연하게 들리던 썸머 송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썸머 송은 보통 여름 전후에 발매되어 사운드나 가사에서 여름을 느낄 수 있고, 여름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도록 미화하는 노래다. 하지만 현재 음원 차트를 살펴보면, 썸머 송이라고 할 만한 곡은 극히 적다. 프로미스나인의 〈Like You Better〉, 하이키의 〈여름이었다〉, 키스 오브 라이프의 〈Sticky〉 정도다. 그마저도 〈Sticky〉는 작년에 발매된 곡이니, 올해 대중의 뇌리에 박힌 새로운 여름 노래는 사실상 두 곡뿐이라는 소리다. 물론 해마다 썸머 송은 나오지만,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영향력도 감소했다. 듣기만 해도 그해 여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썸머 송은 손에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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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벅스


걸 그룹 시장에서는 여러 그룹이 이른바 썸머 퀸 타이틀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2세대에는 〈Loving U〉부터 〈Shake it〉까지 연이은 썸머 송의 히트를 통해 대표 썸머 퀸으로 군림한 씨스타, 3세대에는 〈빨간 맛〉으로 차세대 썸머 퀸에 등극한 레드벨벳, 〈Rollin'〉, 〈운전만 해〉 등 역주행을 성공시킨 브레이브걸스 등 시대를 풍미한 썸머 퀸은 늘 존재해 왔다. 그런데 4세대부터는 썸머 퀸은 물론 썸머 송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대형 기획사들이 썸머 송을 거의 내지 않고 있다. 썸머 송을 발매하더라도 대놓고 여름 노래를 표방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레드벨벳의 대표 썸머 송 3개를 통해서 큰 흐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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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벅스


레드벨벳은 명실상부 3세대 최고의 썸머 송 〈빨간 맛〉으로 씨스타에 뒤이은 차세대 썸머 퀸 자리를 굳혔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 《The Red Summer》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름을 주제로 한 미니 앨범으로, 전체적인 유기성이 뛰어나다. 타이틀곡뿐 아니라 여름을 다채롭게 노래한 수록곡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여름이면 자연스럽게 레드벨벳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빨간 맛〉의 성공 이후 행보는 조금 아쉬웠다. 후속 썸머 송 〈Power Up〉에서는 이전 곡에서 보이던 신선함과 재치 있는 스토리텔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유치한 전개, 개성이 옅어진 후크송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썸머 퀸이라는 이름값에 기대어 치열한 고민 없이 완성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시에 차트 1위를 거머쥐긴 했지만, 제2의 빨간 맛을 기대한 리스너에게는 아쉬움이 컸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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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여름 시장만을 노린 썸머 송은 오히려 악수가 될 수 있다. 여름이라는 특수성을 활용해 성공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룹 색에 맞지 않거나 개성 없는 노래를 낸다면 묻히기 십상이다. 썸머 송이 양날의 검이 되는 것이다. 우주소녀의 〈Happy〉가 그러했다. 이 곡은 팀 고유의 색을 살리지 못한 채, 타 그룹의 향기가 짙게 느껴지는 무난한 썸머 송이었다. 그동안 쌓아온 몽환적이고 청순한 우주소녀만의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려워 팬들의 실망이 컸다. 더욱이 정규 앨범 타이틀곡이었기에 타격은 더 셌다. 정규 앨범의 타이틀은 그룹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을 보여주는 곡이어야 하지만, 〈Happy〉는 갑작스러운 콘셉트 변화를 시도하다 실패한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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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썸머 송으로 그룹의 스펙트럼을 넓힌 사례도 있다. 에스파의 〈Spicy〉는 썸머 송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그룹 색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효자 곡이다. 당시 에스파는 일명 ‘나무심기’ 노래로 컴백할 뻔했을 뿐 아니라 소속사의 경영권 분쟁으로 컴백이 여러 번 연기됐다. 더군다나 전작 〈Girls〉로 주춤하던 터라 확실한 한방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곡이 〈Spicy〉다. 서사적으로는 광야를 벗어나 리얼 월드로 휴가 나온 에스파를 그려내며 세계관의 맛은 연해졌다. 그러면서도 기존 팬들이 음악을 들을 때는 어색하지 않게 했다. 에스파 음악 특유의 무겁고 쨍한 신스 베이스를 이어가며 에스파의 강점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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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Power Up〉 다음으로 나온 〈음파음파〉는 후술할 2019년의 발라드 강세 속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도 여름을 기억하는가? 이때는 놀랍게도 무더운 한여름에 음원 차트 상위권을 발라드가 장악한 시기다. 당시 음원 사재기 논란이 정점을 찍으면서 음원 차트의 신뢰도는 급격히 하락했다. 이후로 여러 번 차트 개편이 이루어지며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과정에서 팬덤 크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실시간 차트가 폐지되면서 차트 변동 폭이 감소했다. 이 말인즉슨 차트에 안정적으로 진입하면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되면서, ‘롱런’이 쉬워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썸머 송은 여름이 지나면 다른 곡보다 빠르게 차트 아웃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때는 실시간 차트로 빠르게 순환하는 구조라서 썸머 송과 그렇지 않은 곡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따라서 소속사는 특정 시기에만 유리한 계절 곡보다 계절에 상관없이 롱런할 수 있는 곡을 선보이려 하게 된 것이다.


19년도 여름 차트.jpg © 독서신문


이와 같이 썸머 송은 시기와 외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름이 평년에 비해 그리 덥지 않거나, 장마가 긴 경우에도 그 위력은 약해진다. 실제로 〈빨간 맛〉도 발매 직후 장마가 시작되면서,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에 밀려 차트 주도권을 잃은 사례가 있다. 다른 계절 곡에 비해 썸머 송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다. 그래서 소속사들은 점차 불확실한 썸머 송 대신 계절감의 영향을 덜 받는, 안전한 노선을 택하게 됐다.


빨간 맛 비오그.PNG © 더쿠


썸머 퀸이 실종된 이유는 4세대 걸 그룹의 특성에서도 드러난다. 4세대 걸 그룹은 데뷔 초부터 글로벌 팬덤을 겨냥하며 걸크러시와 퍼포먼스 중심의 콘셉트를 구축해 왔다. 해외 팬들에게는 청량 콘셉트의 선호도가 비교적 낮기 때문이다. 르세라핌, 에스파처럼 강렬하고 차별화된 이미지는 글로벌 팬덤 확장에 효과적이었다. 국내 대중성 위주의 이전 세대와 달리, 걸 그룹 역시 보이 그룹처럼 글로벌 팬덤형 그룹이 된 것이다. 해당 팬층을 겨냥한 콘셉트를 이어가면서 썸머 송 같이 청순하고 발랄한 콘셉트는 지양하고 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걸 그룹이 강점을 보여 온 청량 콘셉트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제로베이스원, 엔시티 위시 등 오히려 보이 그룹에 집중되고 있다.


썸머 송이 사라진 현실이 이해는 가지만, 썸머 송을 사랑하는 리스너로서 매우 아쉽다. 3세대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대형 기획사를 필두로 완성도 높은 썸머 송을 내놓으며 팬들을 설레게 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남아 있다. 흐름은 분명 돌아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여름을 대표하는 새로운 썸머 퀸이 등장할 거라 굳게 믿는다. 계절에 편승한 평이한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선례가 있다. 앞으로도 그룹 고유의 색을 살리면서도 여름 특유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담아낸 다채로운 썸머 송이 등장하길 기대하겠다.




* 이 글은 아이돌레 웹진 소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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