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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연 Dec 17. 2018

[인터뷰] #3.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 (2)

PROJECT #1 -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의 대표, 석재원 프로듀서 │ MAGAZINE YEON ©


Q.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인지
사실 어떤 호칭이나 이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데 연극 <비: BEA>를 공동제작하면서 갑자기 회사를 만들게 되어서 사명을 짓게 되었어요.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 끝에 원래 정했던 것은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Creative Table)’이었어요. ‘크리에이티브’ + ‘테이블,’ 그러니까 ‘창작자, 예술가들에게 판을 벌려준다’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작업 장소를 ‘스테이지’나 ‘씨어터’라고 규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단어들은 제외했고요.
그러다 사업자 등록을 하러 갔는데, 그 자리에서 ‘석영’을 덧붙여 썼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하셨던 사업체 이름이 ‘석영’이었는데, 그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서 아버지께서 많이 속상해하셨었거든요. 젊은 시절부터 일생을 바친 일이었으니까요. 부모님께서 지금의 저보다 더 어릴 때 몇날 며칠을 밤 새가며 옥편을 찾아 지으신 회사 이름이라고 들어서,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없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엄청 길어졌죠,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 다들 ‘석영’이라 많이들 불러 주시고, 저는 ‘CTS’라고 장난스레 불러요. 어쨌든 석재원이 만들고 있으니 어떻게 불리든 상관이 없고요. 나중에 <비 BEA>를 올렸던 극장에서 리플렛을 보시더니 부모님께서도 많이 좋아하시더라고요.

Q. 스스로 규정하시는 나의 직업적 타이틀이 있다면
일반적으로는 프로듀서.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프로듀서도 좋지만 저는 그냥 공연을 하는 사람이고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리고 계속 공연 안에서 꿈을 꾸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 꿈을 언제까지 꿀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계속 한번 해보려고 해요.


Q. 작품을 찾을 때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저는 직관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직관적으로, 이미지 하나에서 시작한 게 많아요.
<비 BEA>는 신문 기사의 사진 한 장, <하이젠버그>는 극단의 페이스북을 팔로 해서 보던 중 올라온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 사진들이 그 공연이 지닌 색깔을 많이 보여준 거니까요. 대본을 다 읽고 결정하는 건 그다음의 일이고요.
어떤 분위기가 나올지 해외 리뷰를 보고 참고를 많이 하고 있어요. 이제는 제 작품들의 색깔이 조금 보이니까 번역가들이나 에이전트에서 추천을 먼저 해주시는데, 저는 영국 작품들을 좋아해서 영국 신문 문화란 리뷰 많이 찾아보고 몇몇 극단 계속 팔로잉 하며 보고 있고요. 앞으로 하려고 보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 우선 리뷰에서 많이 찾고 거기에서 마음에 훅 들어오는 작품이 있으면 조금 더 찾아 들어가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난 작품들도 눈여겨보고 있어요. 모두가 지금 흥행을 하고 있는 작품들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Q. 1인 제작사로서 제작에 관한 고민에 대하여
1인 제작사이다 보니 그때그때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일의 진행 속도가 좀 느려요. 아직까지 상업 공연을 하고 있는 1인 제작사가 흔하진 않고 그렇다 보니 지원 제도에 가려져 있는 게 현실이에요. 사실 여건은 굉장히 어려워요. 기업에서 후원받는 메세나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쉽지 않고요. 그러다보니 상황은 열악하고 입소문에 기대는 게 많아요.
아직은 저와 함께 해주는 스태프들이 계속해서 도와주고 있어요.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컴퍼니 매니저나 오퍼레이터 등 공연 하나 올릴 때 기본적으로 온스테이지 스태프들이 3,4명 있는데, 아무리 세트도 없고 준비할 것이 없어도 최소한 그분들이 있어야 공연이 돌아가요. 고정적인 스태프나나 직원을 두는 건 쉽지가 않아요. 일반 회사처럼 1년 365일 끌고 갈 수 있는 시스템이면 직원을 둘 수 있는데, 저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추진하는 상황이라 거기에 발맞춰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아직은 제 형편엔 맞는 것 같아서 직원을 더 늘리기도 어렵죠.
계속해서 이런 구조로 갈 것 같기는 한데, 올해 두 작품을 하면서 좀 많은 고민을 하게 됐어요. ‘이렇게 좋은 공연을 괜히 내가 한다고 해서 더 많은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언제까지 제가 부탁을 하면서 공연을 만들 수 없으니까요. 아직 제작사 운영은 초보라서 1인 제작사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올해는 제작사로서 두 작품을 올리면서 관객들에게 석영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도전을 하는 해였다면, 내년에는 신작이 아닌 기존 레퍼토리 공연을 안정적인 구조로 올리며 내부적으로 정비를 하고, 2020년을 대비한 구조를 다듬는 한 해로 만들 계획이에요.

Q. 공연을 통해 관객들과 마주하는 순간은 어떤지
혼자 작품을 몇 년 간 품고 있다가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공연을 올리면 관객들이 정확하게 제 감상을 공감해주시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리고 저의 경우는, ‘내가 맞았구나, 내 선택을 계속 밀고 나가도 되겠구나’라는 확신을 주는 게 관객이거든요. 그때의 희열감이 있어요.
<비 BEA>는 제가 5년간 품어 두었던 작품이었는데 주인공 비가 결국 자신의 행복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 아이 이제 행복하겠다’ 공감하며 함께 흐뭇하게 커튼콜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전)미도 배우에게도, 공연 끝나고 커튼콜 할 때 웃었으면 좋겠다고, 비는 지금 굉장히 행복한 거라고 했고요. 관객들이 너무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 대신 관객들이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첫 공연 날 관객들이 정확히 그렇게 하셨어요. 똑같이 공감해주신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하이젠버그>도, 지금 공연 <내게 빛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제 공연들의 공통점이 이 주인공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는 거거든요. 잘 살았으면 좋겠고 응원하게 되는 거요. 그런데 그걸 다 같이  느낀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봉련 씨의 공연 후기들 중에 주인공을 보며 <넥스트 투 노멀>의 나탈리를 떠올리신 분도 계시더라고요. ‘와, 이게 이렇게 연결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너무 깜짝 놀랐어요. ‘나탈리가 이렇게 애를 쓰면서 살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되게 찡하기도 했고요. 특히 <넥스트 투 노멀>의 초연 때 팀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10년의 터울을 두고 나탈리와 만나게 해 준 게 그 관객분께 너무 감사했어요.

Q. SNS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을 활발히 하시는 편인데
저는 SNS로 관객과 소통을 하는 게 재미있어요. 관객은 제 공연을 사랑해 주는 정말 고마운 존재거든요. 저는 친구처럼 편하게 생각하고 하고 있어요. 분명히 관객 중에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리고 어쨌든 제 공연을 좋아한다는 것은 저랑 감성이 비슷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대화 나누는 것이 저는 당연히 즐거워요. 컴플레인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장에는 수정하기 어렵지만 충분히 참고할 수는 있거든요. 내년 <비 BEA> 재연을 올릴 때쯤에는 관객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석영’ 마니아 카드를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 중이고 그것을 통해 할인 제도나 사전 행사를 할 생각도 가지고 있어요. 제게는 관객들이 든든한 바탕이 되어주시거든요. 아직까지는 관객분들 자체가 너무 신기해요. 너무 감사하고요. <하이젠버그> 때는 제가 프로그램 판매대에 있는데 커피를 사다 주신 분도 계시고 떡을 사다 주신 분도 계셔서 깜짝 놀랐어요.

Q. 초등학교 입학 전, 윤복희 선생님의 <피터팬> 공연을 보고 무대 뒤가 궁금해져서 공연 일을 하게 된 이후, 거쳐온 수많은 일과 인연에 대해
저는 계속 공연을 하겠다고 생각하며 산 사람인데 지금 이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릴 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제가 제 안에 쌓아놓았던 꿈에 대한 힘이 너무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 힘으로 몇 십 년을 가고 있어요. 만약에 그때의 그 심지가, 뿌리가 없었더라면 지금 버티지 못했을 거라 생각이 들고요. 지나온 일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별의별 일을 다 했었어요. 그런 것들이 다 하나의 인연으로 만들어져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제가 아버지 일을 잠시 도와드리느라 잠깐 일반 회사를 다녔던 적이 있는데, 정말 사무직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제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너무 속상했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도 익혔고 영어 번역 작업을 많이 해서 영문 텍스트를 독해하는 실력도 늘었어요. 그리고 그때 회사를 다니며 사회생활에서의 자세와 태도가 잘 입혀져서, 이후에 창작이나 극단 활동을 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전에 ‘싸이월드’도 없던 시절에는 개인 홈페이지를 각자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요. 그때 취미로 들었던 웹마스터 과정조차 지금의 자양분이 되었고요. 한 번쯤은 카페에서 일하는 게 로망이잖아요. 마침 쉬는 동안에 카페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카페가 추상미 씨가 하는 카페였고, 거기에 ‘떼아트르 추’라는 극장이 있었어요. 잠깐 쉬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맛있는 커피를 매일 먹으러 간 건데, 한 달 만에 카페는 관두고 그곳에서 강풀의 <순정 만화>를 처음 만들게 되었죠. 그런 식으로 모든 일들이 연결이 되어 지나고 보니 쓸 데 없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항상 후배들에게, ‘이십 대 때는 하고 싶은 일 다 해봐라. 그러고 나서 삼십 대 들어설 때는 목표가 뭔지 결정해서, 10년 동안은 죽어라 일만 해라’라고 말해줘요. (웃음) 제가 이십 대였을 때 정말 많은 다양한 일들을 했는데 다 좋았던 것 같아요.

Q. 어린 시절의 꿈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을 공연계에서 쭉 지내오셨는데 회의가 든 적은 없었는지
많죠. 공연계 일로 돈을 번지 이십 년째이자 연극을 한지 3년쯤 된 시점이었어요. 한창 많은 공연계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로 진출하고, 저는 그 덕에 제가 하는 공연에서 배우들 스케줄 조정으로 아주 바빴던 해였는데 그동안 제작사 다니면서 모아둔 돈을 다 써버리고 제 통장에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예요. 그 때 20년 만에 처음으로 회의감을 크게 느꼈던 것 같아요.
회의감에 빠져있을 때 또 누군가 우연히 손을 내밀어 줬고, ‘제주에 스토리텔링이 있는 테마파크를 하나 만들어보자,’라는 제안을 받아 기획자로서 영역을 넓혀볼 겸 참여해서 만들고 왔죠. 테마파크 만드는 일을 해보니 돈은 안정적으로 벌었지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돌아와서는, 앞으로 더 이상 공연을 하는 것에  고민하지 않기로 했죠. 
내가 돈보다는 내 꿈을 선택했으니 이 안에서 행복함을 찾고 더 이상 방황하지 말자, 그렇게 일 년을 보냈어요. 작년 가을에 극단 맨씨어터의 <14인의 체홉>, 뮤지컬 <줄리 앤 폴>로 일년  만에 대학로에 돌아와서 공연을 다시 시작했어요. 20년 만의 큰 회의감에 잠시 이탈을 했다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거죠.
분명 회의감이 생겨요. 저희끼리는, ‘연극하는 열정을 증권이나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사업에 썼다면, 지금 돈 엄청 벌었을 텐데’ 같은 우스개 이야기도 하죠. 하지만 못 벗어난다는 것도 이제 알고요. 하필 이런 걸 좋아해서 평생을 바치고 있으니까요. (웃음)

Q. 공연이 없을 때, 사람 석재원의 일상은 어떤 모습인지
밖에서 보시기에 제 공연이 일 년에 몇 작품일 뿐이지, 내부적으로는 계속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공연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어요. 올해의 경우도 드러나는 게 두 작품이지만 실제로 제가 진행하는 작품은 네 편이에요. 공연 외에 시간이 별로 없고 그게 익숙하지 않아요. 늘 공연을 하거나 공연에 대한 준비를 해요. 제 공연이 무대에 오르지 않을 때는 저녁에 시간이 나면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는 편이에요. 그래서 여가는 거의 없고, 대신 읽어야 할 대본이 좀 쌓이면 대본을 읽기 위한 짧은 여행을 가요. 그리고 또 새 작품의 연습이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당일치기라도 제주도를 가서 하루 종일 걷고 오기만 하기도 해요. 배우는 아니지만 저도 제 안에 있는 것들을 좀 털어내고 그리고 연습에 들어가요.

Q. 아직까지는 ‘석영’에서 연극만 올리셨는데, 앞으로 뮤지컬도 제작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분야가 있다면
저는 연극이나 뮤지컬 외에도 무용, 전시, 국악, 모두 (기획 및 제작) 할 생각이 있어요.
지난 시간 동안 뮤지컬 작업을 더 많이 했고 오히려 연극은 한지 얼마 안 됐죠. 지금 저는 뮤지컬 제작 감독으로도 일을 하고 있어서 일 년에 창작 뮤지컬 한 편 정도는 연락이 오면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고요. 아직까지는 제 스스로가 담을 그릇은 아니고, 남이 담는 것에 도움을 줄 수는 있는 것 같아요. 뮤지컬 작업이 즐겁기는 해요, 노래가 주는 에너지가 있잖아요. 반짝이는 다른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만약에 뮤지컬 제작 혹은 창작을 하게 된다면 제 스타일의 뮤지컬을 오랫동안 찾고 준비해서 올릴 것 같아요. 노래인지 대사인지 경계도 모호하고 악기 편성도 독특한, 텍스트 기반의 작품이요. 그런데 <비 BEA>는 3인 극이었고 <하이젠버그>는 2인 극이었고 이번 공연은 1인 극인것처럼 점점 더 말이 없는 걸로 가고 있네요. 배우도 줄고 말도 줄고. (웃음)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미술 전시 큐레이터가 만드는 공연, 그리고 공연기획자가 만드는 전시를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관객을 읽는 일에 있어선 그 어떤 분야 종사자도 공연 관계자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장점을 살려서, 공연기획자로서 전시를 기획해보고 싶어요. 전시장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표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사실 <내게 빛나는 모든 것>도 전시와 함께 해보려고 했어요. 사전 이벤트로 관객분들께 ‘내게 빛나는 것들’을 받아서, 스토리텔링을 붙여 공연장 입구에 전시해보려고 했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못 한 게 아쉽네요. 현재 공연장 앞에 있는 포스트잇들은 전부 모아서 무대 소품으로 쓰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제 공연들에서 축적이 되잖아요. 모아서 책자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Q. 내년 1월에 공연될 <새닙곳 나거든>에 대해 
처음 시작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깊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감정이 단순히 아프고 시린 감정뿐만 아니라 수십 가지의 단편들이 모아져 하나의 감정으로 포장되는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하지만 기획 단계에서 너무 실체가 없는 거라서 중간에 몇 번 포기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용기를 주는 작품들을 보게 됐어요. 관객들이 대사가 없는 구조적인 것으로도 감상을 나누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다시 한번 해보자 해서 기획 제안을 하여 우란과 공동제작으로 준비하게 되었어요.
혼자 준비하는 단계에선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음악은 한국 음악으로 처음부터 계획을 했었고 감정에 대한 표현이니 서사가 있는 텍스트보다는 함축적 언어인  시조로 시작을 해보자고 했어요. 수 백 개의 시조를 찾다가 결국 조선시대 8대 문인인 최경창과 그의 풍류 반려라고 일컬어지는 홍랑이 주고받은 시조가 제가 딱 원하는 애달픈 사랑을 말하고 있어서 그것으로 결정을 했고 그때부터 창작진을 찾아 모았어요. 진행하다 보니 이들의 성향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보고자 하는 니즈가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감성적인 면보다는 감각적인 조선시대의 사랑에 대해 다 파헤쳐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 저희 스태프 중에는 뇌 심리학자도 있어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도움을 주고 계세요.
몇 개월 동안 매주 만나서 배우에게 모티브만 계속 주었어요. 어떤 것도 짜여 있지 않아요. 6개월 동안 저희가 모아서 전달하면 배우가 쌓아둔 걸 가지고 자신의 움직임을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움직임에 따라서 음악과 무대가 나오게 되고요. 어떻게 보면 다원예술인데요, 무용극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요. 하나의 전시를 보는듯한 느낌의 공연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조선시대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서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에요.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이 당시에 봤을 때는 굉장히 이질적이었을 거예요. 몇 리를, 산을 몇 개씩 넘어서 둘이 만나고, 최경창이 죽은 후에는 홍랑이 그 묘지 앞에서 자해를 하며 시묘 살이를 했다고 해요. 저희는 특이하고 이질적이고 남달랐던 그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표현할 것 같아요.
굉장한 도전인데, 순수 창작이자 완전히 제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기획안이었어요. 그 기획안이 이렇게 성사되고 무대화된다는 게 지금은 좀 신기해요. 어떤 공연이 나올지 좀 두고 봐야 해요. 내일부터 연습 시작입니다.

Q.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의 꿈이 있다면
말하자면 밤을 지새울 거예요. (웃음)
저는 계속해서 어렵지 않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집에 가봤더니 좋은 작품이었더라’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관객들과 소통하는 작품이요. 항상 하나의 주제를 지니고 가는 공연을 할 건데 그 주제는 지금처럼 ‘삶에 대한 위로’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면 – 이것도 제가 후기에서 봤는데요 – 제 작품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항상 붙는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좋은 지적이더라고요. 앞으로도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고, 자극적인 소재를 통하지 않고도 많은 관객들과 소통을 하는 것이 저의 꿈이에요. 관객들과, 평범한 일상에서도 나눌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요.
또 하나는 <하이젠버그>를 올리면서 정동환 선생님께 반했는데 연배가 있는 선생님들을 무대에서 더 자주 뵙고 싶어요. <하이젠버그>도 그렇지만 치매에 걸린 아버지에 대한 세련되고 깔끔한 연극이었던 프랑스 연극 <아버지>처럼 현대연극에서 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찾아서 선생님들의 연기와 열정을 자주 보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고, 어느덧 연말을 향해 가고 있네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내게 빛나는 모든 것>을 함께 보고 일년을 되짚어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요?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의 도전과 마찬가지로, 매거진 [연]의 인터뷰도 계속됩니다. 공연계의 반짝반짝 빛나는 여배우 그리고 여성 제작자들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요. SNS를 통해 다음 인터뷰 소식을 전해드리니, 아직 팔로하지 않으신 분들은 트위터 팔로 버튼을 꾹! 누르고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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