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1 -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
Q. 공연 철학이 있다면
첫째,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둘째, 어떤 형식으로 할 건지. 셋째, 지금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1993년 초겨울 제가 처음 연출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키워드들이거든요. 이 세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시작을 하면 적어도 나 자신을 잃고 잠식되진 않겠구나란 생각이 있었고, 그때 했던 생각이 2018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해요. 어떠한 작품을 선택할 때, 이게 분명하지 않으면 외적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Q.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나 고민이, ‘21세기에서의 공연예술의 생존’에 대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긴 한데 이게 괜히 멋부리는 말 같아서. 하루하루 일상이 쌓이면 세기가 되는 거지, 뭐 별건가 싶고요. 아마 제가 밀레니엄,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서 현장에 있었더니 좀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가끔 시간이 좀 나면 지난 10년 동안 사회 시스템과 공연 제작 시스템이 어떻게 변했는지 돌아보거든요. 결국 이게 현재의 제 하루에 영향을 미칠 거라서요. 풀자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첨단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인간의 정서와 인식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문명의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요. 공연 안에서 그 요소들이 충돌하는 게 보이는 거죠. 또 상업성과 독립성의 변별성이 커지게 될 거고. 현실적으로 제게 와닿는 건, 대본 고르기가 너무 힘들어졌어요. 고사하게 되는 이야기가 더 늘어났죠. 한다고 했을 때도, ‘이게 시대를 따라가고 있는 인식이 맞나?’라는 탐색이 나를 너무 숨 막히게 해요. ‘내가 하고 있는 이 생각 역시 이미 뒤처진 건 아닌가?’ 날이 서는 거죠. 또 한편으로는 궁금하고 좀 기대도 돼요. ‘구글의 빅데이터가 드라마터그를 한다면 정말 끝내주게 잘 할 텐데,’ 이미 부분적으로는 데이터의 도움으로 공연이 진행 중이고요. 이런 생각이 공상은 아닐 거예요, 현실적이죠. 1명의 인간 배우와 100명의 AI플레이어, 가상현실이 접목된 공연을 보게 될 날이 오겠죠. 제가 불안전한 인간으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요.
Q. 앞으로의 국내 공연계는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시는지
공연계에서 장기 러닝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졌어요. 승률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거죠. 이게 모두의 고민일 텐데,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승률이 낮은 게임에서 잭팟을 터트려야 되는 거거든요. 피 말리는 거죠. 시장 구조들이 점점 굉장히 치열해져 갈수록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렵고요. 진검 승부만 남을 거예요. 애매한 것들은 결국 사라져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좀 줄어야 되기도 하고.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요? (웃음) 그냥 이 상태로 가진 않을 거고, 어떻게 될지 궁금해요. 수많은 매체에서 양질의 드라마를 만들어요. 영화, 공연예술도 빠르게 모바일 세상으로 흡수되고 있죠. 의미 있는 작품들도 종종 보이고 오락적으로 흥미롭기도 하고. 21세기 대한민국의 관객들은 한 달에 만 원 정도면 손바닥 안에서 시간을 채워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를 접할 수 있습니다. 공연계는 다른 공연들뿐 아니라 양질의 요일별 매체 콘텐츠들과도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이 시간과 돈을 지불하면서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져야만 하죠.
Q. 변화하는 공연계에서 연출가로서 어려움이 있다면
배우들이 다른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몸에서 뿌리내리고 흡수시킬 수 있는. 예전에는 하나의 공연을 만들 때 7,8주 정도의 명확한 시간 테이블이 있었다면, 지금은 여전히 같은 기간이 주어지지만 실질적인 시간은 4,5주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그 시간 동안 대본과 음악을 소화하고 동선을 익히는 기능적인 것들을 하기에도 바빠요. 깊은 이야기까지 하는 게 어렵죠.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얼마 전부터 저는 대안으로 사전 리딩을 훨씬 더 일찍 해요. 아예 3개월 전쯤 2주 정도 모여서 함께 대본을 읽으며 인물이 어떤 말을 쓰는지, 어떤 무기를 지니고 있는지 등을 시간 날 때마다 개별적으로 습득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Q. 일반적인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닌 다른 형태의 무대에서도 여러 번 공연하셨는데
두산 스페이스 111의 <비너스 인 퍼>는 대본의 공간분석과 극장 공간이 딱 맞아떨어졌어요. 그리고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했던 <씨왓아이워너씨>의 십자형 무대도요. 극장이라는 공간과 연출로서 생각하고 있는 공간성이 딱 맞아떨어지면 숨통이 트입니다. 근데 늘 그게 가능하지는 않아요.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운이 좋은 거예요. 극장은 절대조건이라 제가 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또한 정해진 공간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게 제 일이기도 합니다. <비너스 인 퍼> 무대는 폭과 길이가 3미터, 10미터(13미터?)의 런웨이 무대였는데 처음에 배우들도 불편해했고 제작사도 부담스러워했어요. 객석을 추가로 새로 만들어야 했거든요. 불편하다는 관객분들도 계셨어요. ‘얼굴이 잘 안 보인다,’ ‘한 사람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대가 <비너스 인 퍼>에 적합한 공간성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불편한 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무대는 당분간 다시 못 봐요. 새로운 극장 공간에서는 예전의 공간 해석이 가능하지 않거든요. 한편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의 <씨왓아이워너씨> 삼각형 무대는 극장 공간에서 최대한 접점을 찾은 형태이기는 하나 부족합니다. 연강홀의 돌출 불균형 사각 무대였던 <하이젠버그> 역시 의미 있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극장 공간과 대본 해석 공간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Q. 조명, 영상, 무대 등에도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시는 것 같은데
모두들 그럴 거예요. 무대예술은 종합예술이니까. 관객으로서는 좋아하는 공연을 볼 때 앞에서 보고 다시 뒤에서 봅니다. 앞에서는 배우들, 무용수들, 연주자의 표정, 몸짓, 연주하는 손가락을 보고, 뒷자리에 앉을 때는 연출로서 빛과 공간, 소리, 인간이 결합되면서 만들어내는 조형성, 에너지의 흐름을 봐요. 두 가지 모두 의미 있습니다.
특히 빛을 좋아합니다. 빛은 신비롭고 섬세해요. 그래서 조명 작업에 시간이 더 많이 듭니다. 좋아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빛의 소스(광원)들이 기술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무빙 라이트는 이제 필수가 되었죠. 영상도 빛의 한 종류고요.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온도가 좀 달라요. 공연마다 가장 적합한 도구를 결정해야 합니다. <비너스 인 퍼>와 <하이젠버그>는 무빙 라이트를 한 대도 안 썼고. 다 엘립소이드(핀 조명)였어요. 요즘 공연은 무빙 라이트가 없으면 힘들죠. 특히 뮤지컬은 필수. 내년에 하는 공연들도 연극은 무빙을 최소화할 것 같아요. 장식을 빼겠다는 얘긴데, 배우들이 싫어해요. (웃음) 모두 다 최소화시키고 진검승부하는 거예요. 좋은 북(대본), 그걸 잘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배우, 그리고 모든 장식을 뺀 빛, 가장 담백한 무대. 연극은 그렇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공연을 그렇게 푸는 것 아닙니다. 제 역할은 대본과 악보의 첫 단추를 잘 해석해내는 것이에요. 각각에 가장 적합한 빛과 공간 그 외 요소들 포함해서요. 첫 단추가 잘못되면 마지막 단추인 첫 공연은 설 곳이 없게 되죠.
"수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 치는 그 안에 또 다른 빈 공간에서 응시하는 저예요. 작업할 때 저런 심리적 공간이 늘 있어요. 소요와 정적."
Q. <명동 로망스>, 씨어터다소니에서의 공연이 어느덧 보름밖에 안 남았네요.
얼마 안 남았어요. <명동 로망스>는 작은 공연인데 만들기 어려운 공연이기도 해요. 무대도 비틀려있고 경사 무대이고 사용되는 색도 많고, 작은 전식(불빛)들이 있어서 핸들링 할 것도 있고, 공간의 변화도 크죠. 그런 요소로 보면 <명동 로망스>는 중극장에 어울리는 공연이지만, 이야기가 가지고 감성은 또 소극장이라 좀 충돌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귀한 공연이에요. 또 못할 수도 있어서 이번 시즌이 더 애틋합니다.
2015년 <명동 로망스>가 초연을 할 수 있었던 건 제작사 장인이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이에요. 이 공연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어요. 제작사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전체 창작진, 출연진들도 마음을 다했고요.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고단했지만 만드는 과정도 결과도 행복했어요. 제작사는 창작권을 완전히 확보해줬고 오롯이 창작자들이 그것들을 펼칠 수 있게 서포트해줬어요. 그래서 재연까지 온 거죠. 로망스 다방은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유달리 커요. 이번 시즌은 여러 가지 난제들이 있어서 초연보다 고전분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네, 그래요. 그래서 더 소중했던 것들을 잊지 않으려 해요. 마지막일 수 있으니까요.
Q. 손수 지은 약밥부터 직접 볶아 만든 커피 드립백까지, 프로나눔러세요.
<명동 로망스>에서 많이 하죠. 이런 얘길 들은 적도 있어요. ‘왜 다른 공연에서는 안 하고 <명동 로망스>에서만 하냐, 다른 공연은 안 좋아하나.’ 상대적으로 섭섭함 느끼실 수 있어요. <명동 로망스>는 멘토링부터 했고 초연까지 오는 데만 3년이 걸렸어요. 마치 품 안에 약한 아이를 안고 ‘얘가 뚜벅뚜벅 걸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초연을 올린 후 연장 공연에 들어서면서 마케팅팀이 빠져버렸는데, 혹시 힘 빠질까 봐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사실 다른 공연도 다 이렇게 하고 싶어요. 공연이 하나의 문화 상품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축제면 좋으니까. 공연할 때 저희가 많은 것들을 관객 여러분들께 받아요. 유형으로 무형으로 많은 사랑을 주세요. 그게 순환되면 좋잖아요. 그럼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공연 마치고 나와서 배고픈데 약밥 한 조각, 따뜻한 차 한 잔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나눔 할 때는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나눔 하려고 해요. 물론 약밥 500개, 드립백 200개 정도 되면 후반쯤 내가 이걸 왜 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꼭 한 번은 들어요. 가내수공 방식인지라.
Q. 전작 <52 Blue>도 그렇고, 고래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김민정에게 고래란 어떤 존재인가요
고래는… 코끼리만큼 아름다운 존재예요. 저한테 동경의 대상이에요. 굉장히 신비롭고, 많은 미지의 것들을 품고 있어요. 고래도 포유류잖아요. 인간을 굉장히 많이 닮은 듯하면서, 그 안에 히스토리가 많아요. 고래를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좀 들어요.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물이라는 공간과 각별한 게 있어요. 다섯 살 때 파도에 떠내려가서 한 끗 차이로 죽을 수 있는 긴장된 상태였는데 제가 그 안에서 느꼈던 건 좀 이상한 거예요. 두려움이 아니라 낯선 평화로움, 고요한 바람과 정적, 신기한 느낌. 그때 타고 있던 게 아동용 돌고래 고무보트였어요. 그때부터였을까요? 고래과 저의 인연은?
고래는… 저한테는… 제가 아주 외로울 때 제 옆을 지키며 유영하고 있는 것 같은 존재예요.
Q.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지금은 내년 봄 엘지아트센터에서 올라갈 신작을 준비 중이고요. 여름에 중극장 규모의 재연, 하반기는 올해 하기도 했으나 미뤄졌던 뮤지컬 초연이 올라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 사이 <나, 혜석>과 작은 독립 프로젝트를 할 거고. 장기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계획입니다. 독립성을 띤다는 건 그만큼의 기회비용이 따라요. 자본으로 보상되는 게 아니라서 내부 원동력이 훨씬 더 커야 하고요. 그리고 이 일에 정확히 동의하고 그 원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힘이 약해져요. 함께할 수 있는 실력 있는 메이커들. 실력 중요해요. (웃음) 다행히도 너무 헛되이 살진 않았는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웃음) 작업 과정에 낯선 새로움이 있는 일을 하고자 할 겁니다.
제가 앞으로 뭘 했으면 좋겠어요? [전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정말요? 괜찮아요? [네.]
Q.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에 대해
21세기에는 뜻이 있는 개인의 연대가 너무나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잠식될 거예요. 이미 지구는 가치와 이상보다는 국가 개념을 넘어선 거대한 대기업 자본에 잠식당하고 있어요. 지엽적으로는 올해 아파트값이 폭등하면서 또 한바탕 휘청했죠. 그게 개개인에게 미친 영향이 되게 커요. 많은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무기력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어요. 가치를 가치 없게 만들었죠. 개별의 가치와 힘들을 자꾸 무력화시키고, 그것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고, 자꾸 분리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개별적인 연대가 정말로 중요한 시대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없이는 지구에 사는 평범한 우리들은 불행해질 거예요. 다행히도 독이자 약인 21세기의 기술들이 있고 개인은 더 쉽고 빠르게 연대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됐죠. 문화예술 또한 마찬가지인데, 매거진 [연]도 그런 흐름의 일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인터뷰를 요청받고 난 다음 매거진 [연] 웹진을 봤어요. 좋더라고요, 좋아서 한다고 그랬어요. 매거진 [연]이 쓰고 있는 단어들이 좋더라고요. ‘꾸밈 노동, 이런 단어를 쓰는 매거진이면 만나보고 싶은데?’ 이 생각이 있었어요. 1인 제작사 석재원 프로듀서를 인터뷰한 것도 좀 흥미로웠고요. 작은 잡지사라는 것도 좋았어요. 이제는 그런 시대가 확장될 거라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는데 제 눈앞에도 딱 나타난 거죠. 매거진 [연]이 새롭고 신선한 시선을 담을 수 있는 좋은 잡지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공연계에 애정을 가져주셔서.
저는 이 가치에 동의하고, 제가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작은 연대의 표현이에요. 연대만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고 더 가치 있는 이상을 꿈꿀 수 있는 무기가 아닐까 해요. 지금 매거진 [연]이 하고 있는 이 생각들을 지속시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잘 부탁합니다. 진심으로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을 곁에서 보면서 또 다른 누군가가 힘을 낼 거거든요. 저도 힘 좀 받아보려고요. (웃음)
매거진 [연]의 인터뷰는 데드라인이 없습니다. 인터뷰이와 함께 시간을 충분히 들여 글의 내용과 언어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여러분께 글이 전해지기까지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어디에서 누구와 계시든, 어떤 공연을 보시든(!) 웃음 가득한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저는 ‘로망스 다방’이 아직 영업 중일 때 다시 한 번 찾아가 보려 합니다. 다음 인터뷰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