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속삭임
서울의 밤은 차가운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오래된 골목 끝에 숨겨진 작은 책방,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묵직한 공기가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책 등을 타고 미끄러지던 달빛은 잠시 숨을 고르듯 은은히 번지다, 이내 어둠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닫힌 문 너머로 시간은 멈춘 듯 흘렀고, 그 공간은 숨겨진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것이 닫힌 문에 가로막힌 채, 누구도 닿지 못할 비밀처럼 남아 있었다.
나와 그가 함께 겪은 비밀의 숲은 단지 나무와 풀이 자라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가 외면해 오던 진실이 깊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장소였다. 억눌렸던 기억과 상처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뿌리처럼 땅 속에서 꿈틀거리며 피어났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곳은 우리를 감싸듯 휘감으며, 때로는 시험하듯 혹독한 시간 앞에 마주 세웠다. 우리가 이 시간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면, 그 어둠은 우리를 더욱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숲을 가로질러 흐르던 어둠의 강은 나를 다시 상처의 근원으로 천천히 이끌어갔다. 검은 물살은 고요했지만 그 깊은 어둠은 아주 오래된 기억의 무게를 안고 흐르는 듯했고, 우리는 그 강을 건너는 동안 수없이 내리누르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렸다. 그렇게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의 나무가 서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늘 푸른 그 나무는 우리가 쌓아둔 모든 상처를 품은 채, 고통 속에서 자라난 진실의 형상이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숨을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상처들은 나를 억누르기보다는,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들며 살아남는 힘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나는 지나온 길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돌아온 서울의 거리,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고 태어나는 것들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 골목 끝에 자리한 책방만큼은 늘 그 자리에서 담담히 있어 주었다.
책방의 닫힌 문 뒤에는 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고,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불멧돼지가 책방을 나서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뒷모습에는 어딘가 숲의 어둠과 닮아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다시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문이 닫히면, 책방은 스스로 심장을 멈추듯 조용해졌다. 작은 불빛은 서가를 비추며 잠깐의 온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책방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지만,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무언가가 다시 한번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닫힌 문 뒤에 이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달빛의 고요한 속삭임이, 귀 기울인 자의 귓가에만 고요하게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