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위에 자라는 것들
숲의 심장부에 다다르자,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나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습기가 감도는 공기 속에서, 나무는 마치 나를 기다린 듯 묵묵히 서 있었다. 뻗은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길게 펼쳐졌고, 바람이 스치자 나뭇잎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나무 아래 서 있는 내 존재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고, 나뭇잎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은 마치 나무가 나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려는 듯 들렸다. 발밑의 흙은 차가웠지만 부드러웠고, 그 흙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오래된 상처들이 서서히 깨어나는 듯했다.
손끝에 닿는 쪽지의 종이 질감이 느껴졌다. 불멧돼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자유의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리라." 그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 만약 자유가 그런 것이라면,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었다. 나무는 내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상처를 지우는 게 아니라 그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이 순간을 마주하고, 그 차가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통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고, 생생하게 깨어나는 그 느낌을 온전히 느끼려 했다. 내 안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상처들이 하나씩 깨어나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느껴졌다. 나는 그 상처들이 남긴 흔적들 속에서 나 자신을 찾고, 그 흔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고통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나무와 내가 하나 되어 숨을 쉬는 듯한 순간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나무의 거친 껍질을 만졌다. 껍질 너머로 느껴지는 생명의 맥박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 미묘한 진동은 손끝에서부터 차오르며,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던 상처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 진동은 마치 속삭이듯 나에게 말했다. 자유란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들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상처를 안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선택의 힘, 그 힘이 나무의 맥박을 따라 손끝에서 온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바람이 다시 한번 나뭇잎 사이로 불어왔다. 바람에 실려온 초록의 향이 내 피부에 닿았고, 나무의 뿌리처럼, 나의 삶도 다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나무처럼 상처와 함께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처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좋아.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속삭이듯 내뱉은 이 말은, 그저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고, 나무에게 던진 인사이기도 했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내 발밑의 뿌리는 더 이상 나를 얽매지 않았다.
숲의 끝에서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발밑의 흙이 나를 감싸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나는 미소 지었다. 더 이상 어둠에 갇히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빛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발밑의 흙이 차갑지만 부드럽게 나를 감싸주었을 때, 문득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끝에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꽃은 마치 나의 새로운 시작을 비추는 듯했다. 그 꽃을 바라보자, 내 안에 깃든 고통과 상처들이 더 이상 무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는, 그 꽃처럼, 상처를 품고도 다시 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내 손끝에서 따스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마치 나무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내 안에서 새로운 힘이 자라나는 것이 분명했다. 나무가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걸까? 손을 내려다보니, 내 손가락 끝에서 하얀 꽃잎 하나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의 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자라난, 나만의 꽃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하얀 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나무가 나에게 준 것은 단순한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는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도 나무처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꽃잎이 천천히 흩날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나무의 그늘에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 스스로 뿌리내린 자였다. 이제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길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 안에서 피어난 생명처럼, 나도 다시 스스로 빛을 향해 피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