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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in Gary] 레이디 L

불완전한 인간, 그 잔혹한 아름다움

by maggie chae

“진짜는, 진정한 향락주의자는 쾌락 없이 살 수 있고, 고행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타인의 희열이 제공하는 무한히 흡족한 광경을 맛보는 것이 허용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불교적 의미에서 관음자가 되지요. 사실 동양에서 명상을 통한 초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부처는 자신의 쾌락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겁니다. 그래서 숨 쉬는 모든 생물의 기쁨에 둘러싸이고 싶어 했죠.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의 기쁨은 살아남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순간부터 죽음은 행복 속에 빠져드는 달콤한 익사일 뿐인 거요.....” — p.132




이 문장은 『레이디 L』에서 쾌락과 초탈, 그리고 관음(觀音)의 개념을 한데 묶어 인간의 감정과 의식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어. 로맹 가리는 여기서 단순히 향락을 찬양하거나 금욕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쾌락을 초월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소설의 주인공 다이엔, 즉 레이디 L의 삶과 맞닿아 있어.


다이엔은 거리의 여인이었고, 혁명가 트리스탄의 연인이었어. 그는 세상의 불의를 뒤집으려는 열정으로 살아갔지만, 시대의 혁명과 불길 속에서 다이엔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얼마나 뜨겁고, 또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되지. 그녀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세상의 혼란과 자유를 동시에 맛본 거야. 그러다 트리스탄의 이상이 무너지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다른 세계로 발을 옮겨. (이 과정은 책을 읽는 동안 간과했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때리는 훅이 된다..) 그렇게 귀족의 삶에 들어가, 품위와 안정이라는 완전히 다른 질서 속에 자신을 새롭게 꾸며내지.


하지만 이 품위는 단단한 갑옷이 아니라, 언제든 금이 갈 수 있는 유리 같은 것이었어. 다이엔은 자신이 쌓아 올린 위엄 속에서조차 늘 무너질 위험을 안고 있었고, 모순적으로 이 불안이 그녀를 살아 있게 했지. 낮에는 완벽한 귀부인으로, 밤에는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세계의 잔향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 욕망과 절제, 타락과 숭고함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 그래서 로맹 가리가 말한 ‘쾌락 없이 사는 향락주의자’라는 말이 그녀에게 닿듯이 느껴진걸 거야.


다이엔은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욕망에 삼켜지지도 않았어. 자신이 직접 행복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타인의 질서와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웠지. 이런 삶은 일종의 초탈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균형이었어. 그녀는 타락 속에서 품위를 지켰고, 품위 속에서 타락을 숨겼지. 이 모순이야말로 다이엔을 인간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만든 힘이었을 거야.


이후의 다이엔은 귀족 사회의 상징처럼 살아가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과거의 불꽃에 묶여 있어. 세월이 흐르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완벽한 세계를 조용히 회상해. “걸작이라면 넌더리가 났다”는 말처럼, 완벽한 것들에 지쳐버린 노년의 여인은 이제 조잡한 그림엽서나 빅토리아풍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들—물에 빠진 아기를 구하는 개, 달빛 아래의 연인들—속에서 오히려 따뜻한 위안을 찾아. 젊은 날의 열정보다는 훨씬 차분한 감정이지만, 이 안에는 삶을 버텨낸 인간의 고요한 확신이 담겨 있지.


이 지점에서 p.132의 문장이 다시 떠올라. “숨 쉬는 모든 생물의 기쁨에 둘러싸이고 싶어 했죠.” 다이엔은 자신이 직접 쾌락을 누릴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았지만, 결국 타인의 삶 속에서, 타인의 행복이 유지되는 질서 속에서 일종의 평화를 얻었어. 그건 불교적 의미의 관음자가 도달한 초월과는 다르지만, 인간이 현실 속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형태의 초탈이었을지도 몰라.


로맹 가리가 다이엔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건 인간의 복잡함이야. 그는 인간을 꾸미지 않았고, 그 안의 모순을 숨기지 않았지. 그에게 욕망은 죄가 아니었고, 타락은 부끄러움이 아니었어. 오히려 그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겠지. 그래서 『레이디 L』의 세계에서 숭고함은 순수함이 아니라, 오염과 타락의 반대편에 있는 감정이야. 완벽하게 깨끗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더러움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시도—그게 바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거든.


다이엔은 세상의 욕망 속에서 자신을 소모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진실한 얼굴을 보여줬어. 품위는 타락 속에서 만들어지고, 타락은 품위를 통해 숨겨졌지. 이 모든 모순이 한 사람 안에서 부딪히며 흘러갈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덮고 나서 확신하게 됐어. 로맹 가리는 사랑을 쓴 작가가 아니라, 인간의 끝을 쓴 작가였다고 말이야. 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또 얼마나 잔혹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줬어.


『레이디 L』을 다 읽고 나면 감정의 온도는 낮아지는데, 사람에 대한 이해는 훨씬 깊어질 거야. 로맹 가리는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실험이었다는 걸 증명한 작가 같아.


사랑하는 인간은 모두 위대해. 불완전함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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