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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나무가 되고 싶다’에 닿아버린 마음

by maggie chae

시애틀에 오면 꼭 들르고 싶었던 서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Elliott Bay Book Company.


언젠가 꼭 가겠다고 마음속에 찜해두었던 공간인데, 실제로 들어가 보니, 듣던 대로 책마다 직원들의 손글씨 서평 카드가 붙어 있어서 책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감상이 켜켜이 쌓인 공간 같았어. 책을 고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잠깐 빌려 읽을 이유를 건네받는 경험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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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liott Bay Book Company & 가슴 아프게 읽었던 small things like 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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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소중한 두 권의 책 : D



그러다 선명한 빨간 표지가 시야를 확 끌어당겼어. 『The Vegetarian』 — 제목 아래 ‘Han Kang’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낯선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내가 아는 세계가 불쑥 나타난 것처럼 가슴이 묘하게 뛰었어. 타지의 서점에서 한국 작가의 이름을 마주치니까 괜히 반갑고, 조금은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했어. 그래서 망설임 없이 책을 집어 들었지. 이 책이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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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Elliott Bay Book Company



그런데 막상 손에 쥐자마자 예전에 한국에서 이 소설을 읽다 도중에 멈춰버렸던 기억이 떠올랐어. 어떤 장면에 닿기도 전에 이상하게 마음이 눌려서, 끝까지 갈 자신이 없다고 느끼며 책을 덮어버린 적이 있었거든. 그때는 “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묘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어.


그런데 시애틀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 책을 다시 마주하니, 옛날에 나를 겁주었던 이야기의 그림자를 이제는 천천히 바라볼 용기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어. 그렇게 다시 영혜를 만났고, 이따금씩 감정의 낯섦 앞에 멈칫했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고, 좀 더 대담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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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정도 다시 읽었던 첫 페이지



그리고 다시 이 책을 읽은 후 깨달았지. 이 소설은 ‘채식을 선택한 여자’의 단순한 이야기 따위가 아니라는 걸.


영혜가 “나는 고기 냄새가 싫어요”라고 말할 때, 그건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이미 고통의 언어가 되어버린 세계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어. 그녀는 차라리 식물을 닮아가려 했고, 이건 인간의 욕망과 폭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려는 시도였지. 아름답지도, 전형적인 비극도 아니었어. 기분 나쁘게 불편하면서도 고요했고, 폭력적으로 절망적인데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어.


어떤 면에서 ‘공감할 수 있는, 공감을 바라는 이야기’라기보다, ‘내가 감당 가능한 만큼만 이해를 허락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떤 독자들은 영혜의 감정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며 마음을 찢겼고, 또 어떤 독자들은 “도저히 읽어낼 수 없다”며 책을 중간에 덮었어. 실제로 자해 묘사나 동물 학대, 친척과의 부적절한 관계, 식음을 끊은 끝에 육체가 파괴되어 가는 영혜의 마지막 모습 같은 장면들 때문에 “이 책은 미성년자가 읽기엔 너무 잔혹하다”는 의견도 꽤 많았지. 가수 김창완은 “너무 끔찍해서 완독 하기 힘들었다”라고 말했고, 그의 감상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많은 독자들이 “나도 그랬다”며 공감하기도 했어.


그래, 다수의 사람들이 예전의 나처럼 이 내용을 끝내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이제 모든 장면에 공감하지 않아도 이 이야기를 픽션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어.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제 그때의 나와는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영혜라는 인물의 극단적인 선택에 머무는 소설이 아니었어. 세 개의 장을 따라가다 보면, 영혜가 아니라 ‘영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바뀌면서, 결국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정의하고 소비하는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 남편의 시선 속 영혜는 “갑자기 이상해진 여자”일 뿐이고, 형부에게 그녀는 욕망의 대상이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바뀌어. 마지막 장에서 언니 인혜는, 무너져가는 영혜를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는 절망과 책임감을 동시에 견디다가, 결국 자신도 어디선가 서서히 마르고 있다는 불안을 마주하게 되지.


영혜는 점점 “나무가 되고 싶다”는 말만 반복하게 되고, 그 말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선언이 되어버린 거야. 인간으로 남는 것보다 식물로 존재하는 쪽을 택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행동이면서도, 어쩌면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식이기도 한 것 같아. 소설의 마지막에 영혜가 바람을 느끼며 가지처럼 팔을 뻗는 장면은, 글쎄, 누군가에게는 기묘한 공포이고, 누군가에게는 해방, 어떤 이에게는 끝끝내 다다른 고요처럼 보일 수 있어.


그걸 바라보는 인혜의 시선도 결국은 무너져. “나도 어디선가 조금씩 말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 올라오면서, 이 이야기는 어느 순간 영혜만의 파국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채 서서히 쇠약해져 가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겹쳐지기 시작해. 인혜의 감정은 독자에게도 은근히 스며들고, 질문은 자연스럽게 우리 쪽으로 넘어와.


이 소설은 그래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읽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이 고통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내 한계를 마주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되어버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조용히 자신에게 묻게 되지.


― 나는 지금,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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