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지 6개월이 되어간다.

여전히 생생한 10년의 기억

by cranky witch

우리는 참 오래 만나왔었다.


한 IT기업의 컨퍼런스에서 우연히 대화하게 되면서 시작한 우리가 만난 지 3년쯤 되었을 때, 그가 외국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그에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울며 말했지만, 가는 것이 그에게 좋은 선택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외국으로 나가자마자 코로나가 터졌고, 우리는 거의 3년을 얼굴도 못 보는 사이로 지냈다. 물론, 우리 둘 다 재택이라 통화는 자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영상통화를 켜두고 각자의 일을 하면서, 시간을 맞춰 동시에 넷플릭스 영화를 클릭하면서, 그렇게 못다 한 만남을 통화로 대체했다. 그즈음의 나는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사이버 연애'중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실물 얼굴을 못 본 채로 하는 2D 연애가 3년이 다 되어갈 때쯤 고비가 왔다. 더 이상은 안 되겠으니 어떻게든 무조건 외국으로 나가야겠다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해당 국가의 무비자 입국이 열렸다. 그 이후로 몇 년간을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얼굴을 보는 롱디 관계로 지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을 내가 10번째로 축하해 주고 돌아온 다음 주에 우리의 오랜 관계는 끝이 났다.


'어차피 이렇게 끝날 사이였다면, 진작 끝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결론이 헤어짐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했던 모든 과정이 다 변명처럼, 헤어짐을 이겨낼 만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다.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배웠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삶에 안정을 주는지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칠 위험에 처한 순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배웠다.

나는 상대의 행동과 감정에 이유가 있다고 믿으며 상대가 그걸 언어로 자세히 설명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이란 걸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그럴 수 없음에도 사랑해 주는 그를 보며 이렇게 사랑하는 거구나를 배웠다.


헤어짐을 마음먹었을 때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결심을 굳게 다잡아도 10년간 쌓아온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질 순 없다. 그래서 헤어지고 난 이후에 그가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을지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찢어지게 아릴거란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 결론을 따라야 한다고 감정에 흔들리지 말라고 되뇌었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 ‘콘택트(Arrival)’의 주인공, 언어학자 루이스가 떠오른다. 그녀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면서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습득하게 된다. 외계인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선형적 시간에 살고 있지 않았다. 대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외계인처럼 사고하게 된 그녀는 점점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외계인 대처(?) 현장에서 만난 그 남자와 결혼하면 어떤 슬픈 일이 벌어질 지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결혼을 선택했다. (참고로, 그 남자는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왜 미래를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하냐고 화를 낸다. 삶에 대한 태도가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선택이 나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미래를 바꾸고 싶어서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불안을 해소하고자 미래를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니까. 루이스가 알면서 결혼을 선택했던 것처럼, 나도 알면서 이별을 선택했다. 마음 아픈 미래라고 해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차분하게 그녀처럼 그 정해진, 어쩌면 너무 슬픈 미래를 담담히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전은 역시 어려웠다. 슬플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그대로 선택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루이스도 이렇게 용기로 선택하고, 그 선택 뒤의 감정을 고스란히 감당했겠구나 싶다. 이제 6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야 뒤늦게 감정의 폭풍이 찾아온다. 선택의 여파가 얼마쯤 뒤면 괜찮아질지 또 미래가 알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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