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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May 03. 2023

막내가 꿈에 나왔다

빛바래고 희미해진 우리의 관계는 단지 변한 것이구나.

막내가 꿈에 나왔다. 그는 맑고 밝고 행복한 얼굴로 거실을 이리저리 쪼르르 뛰어다니며, “이거 봐라! 아빠가 이거 줬다!” 한다. 자랑스레 양팔을 만세 하며 드높이는 건 죄 쓸모없는 것들이다. 비닐이랄까 하는 것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기 막내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야, 막내야. 너 너무 귀엽다!” 한다. 그러고는 어쩐지 다 큰 막내가 뒤에서 듣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머쓱해져서는 화끈거리고 말았다. 


잠에서 깨고도 여운이 제법 길게 간다. 꿈 자체는 벌써 희미해져서 방방 뛰던 그 꼬마가 진짜 막내가 맞는지 갸웃하면서도, 오랜만에 느끼는 낯설고도 따스했던 순간은 여전히 생생한 듯함에 기분이 묘하다. 그럴 만도 한 건 우리는 다 큰 성인이 된 지 오래고, 서로가 살갑고 소중했던 시절은 이미 까마득하기 때문이다.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징그러운 날이 더 많았고, 살갑기는커녕 서로의 안부조차 묻는 일이 드문.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서로에 대한 서운함은 저마다 알아서 달래는.


다시 문득.

빛바래고 희미해진 우리의 관계는 단지 변한 것이구나. 그로 인해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지금의 것은 볼품이 없어도 소중했던 시절은 변함없이 남아있구나. 그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더 반짝이는구나. 오래 잊었던 사실을 깨닫는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잃었던 것들, 사라진 줄 알았던 모든 것들도 실은 단지 잊혔을 뿐이다. 아팠던 일들, 무너졌던 일들, 결국에는, 결국에는 잠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던 모든 일들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찬란했던 순간이 존재했다.


어쩐지 용기를 얻는다. 든든한 희망이 샘솟는다. 끝이 아무리 아프다고 한들, 모든 것에는 빛이 깃든 순간이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부신 그런 순간들이. 어쩌면 나는 관계의 마지막 모습에 너무 과하게 집착해 온 거 아닐까. 생 자체가 과정에 불과하듯,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는 마지막이 아니라 그 과정 중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는 더 많이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솔솔. 아니, 사실은 애초에 웃는 순간이 더 많았음을 깨우쳤는지도. 여전히 웃기도, 아프기도, 어쩌면 때때로 울기도 하겠지만, 결국 그 순간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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