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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Sep 04. 2024

프롤로그: 엄마, 우리 유럽 여행 갈까?

모든 것이 대체 가능한 세상에서, 두 사람, 대체불가능

정말이지 지치는 날들이었다. 작열하는 태양보다도 눅진눅진한 공기가 문제였다. 하루하루를 짓누르는 생업의 무게감보다 그 무게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옥죄였다. 하루가 다르게 날카로워지는 감정에 여러 날 동안 묘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로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자. 주말까지만. 내일까지만. 휴가까지만.


날카롭게 날이 서 있지만 그건 감정에 맞닿은 일부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외려 우둔해졌다. 지갑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어이없는 짓을 했지만, 덕분에 편의점에서 소주를 못 사고 쫓겨났지만. 그까짓 일들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수준이 못 되었다. 오히려 기가 차서 나온 헛웃음도 웃음이라며 반가웠다면 모를까. 쉼 없이 분주하고, 다른 얼굴을 마주하면 애써 웃어 보였지만 정말이지 겨우겨우였다. 


휴가지는 밀양. 연초에 내려간 이후로 올해는 한 번도 가지 못한 본가다. 밀양행 기차표는 아침 8시로 끊어 두었다. 오전에 도착해야만 아빠가 데리러 온다.


야. 이거 함 봐봐라. 니그 아빠가 이거를 니 생일선물이라고 사다 놨다. 츠암내. 뭐라는 줄 아나? 이 통 위에 생.일.선.물. 이래 쓰라는 거 있제.

으헤헤헤헥. 내가 있제. 어제 홈플러스 가가지고 한 바쿠 삥 돌았는데, 니가 좋아할 만한 게 이 하리보뿐이 없드라. 이거 니 안주아이가.

와… 전혀 마음에 안 드네. 뭐, 그래도 사놨으니까 하나 먹어준다. 


마음이 무겁다. 입을 어떻게 떼야 할까. 나 이제 더는 못 버티겠다고. 엄마, 아빠가 또 불안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진짜 자랑스러운 자식과는 영영 멀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가진 돈 다 털어서 써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불행한 오늘 대신 불투명한 내일을 선택해 보려 한다고. 그래서 조금은 무섭다고.


엄마. 우리 유럽 여행 갈까?

이기 뭐라하노? 내는 인자 힘들어서 그런 데 몬 간다.

…….


입만 달싹거리며 하루,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이 반가워 또 하루. 날이 너무 더우니까 또 하루. 기어이 입을 떼지 못한 채로 보낸 시간들.


아빠. 이거 보세요. 3월 10일 빈으로 가서 4월 3일에 로마에서 나오는 거. 이거 지금 프레스티지석 딱 3개 되는데.

가마 있어봐라. 니 마일리지 되나?

네. 저는 여유 있고, 엄마 꺼만 아빠가 넘겨주면 돼요.

뭐라 하노? 지금 내도 간다 했나? 안 된다. 내는 놓고 가라.

안 된다. 진짜 가기 싫으면 나중에 취소해 줄게.

허… 참내. 언제라고?


늘 뭐 하나 해달라 부탁하면 세월네월하던 아빠가 얼른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다 자신의 마일리지와 엄마의 마일리지를 통합해 준다. 일사천리로 예약을 마치자 어리둥절한 엄마만 남았다.


니 이렇게 길게 여행 갈 수 있나? 회사는 우짜고?

때리치고 가야지.

아 맞나. 그래! 니 이제 진짜 취직한다는 소리 고마해라.

안 한다. 이제 진짜 안 한다.


마음이 울면서 웃는다. 모든 것이 대체될 수 있는 세상.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무실의 작은 한 켠. 실은 당장 내일부터 누가 와서 앉아있어도 놀랍지 않은. ‘나의’집이라고 하고 있는 집은. 지금이야 매일매일 내가 돌아가 몸을 누이지만 내년 이맘때는 다른 이가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 친구, 애인은. 까짓거 술도 있고 공연도 있고, 요즘 같아선 그저 스마트폰 정도로도 충분할 수 있지.


아무 말도 못했지만 모든 말은 한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그런 거. 그런 사람. 그런 존재.

아무 말도 못 들었지만 모든 말을 들은 것 같은 그런 거. 그런 사람. 그런 존재.

이게 어떻게 대체가 되겠어.


아- 됐다. 이제 2월까진 일 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 2월까지 버는 거는 우리 여행 경비다.

그래, 일 할 힘을 좀 얻었나?

아니. 살아갈 힘을 얻었다.


| 2023.08.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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