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는 이야기-재미 없음
서울/인천 ⇀ 비엔나
2024.03.10. (일) 12:05
두근두근 설렘이 가득하기보다는, 한편으로의 두려움과 긴장이 단순한 염려가 아닐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 날들이었다. 티켓 구매 후 반년이 지나 맞이한 오늘은 역시나 날 선 신경에 전보다 더 곤두선 채였다.
집에서 서울역은 도보로 15분. 짧지 않은 여행 일정에 다소 부담스러운 수하물 무게 때문에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직통 열차를 예매하면 서울역에서 미리 체크인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공항에 비하면 인파도 적은 편이고, 직행 열차를 통해 일반 공항 철도(지하철)를 이용하는 것보다 빠르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으니, 새벽부터 움직이는 부모님의 컨디션까지 고려하자면 몇 천 원 더 든다고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8시 10분 열차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건 9시 남짓. 손도 가볍고, 여유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편했는데, 실은 출국장을 찾는 데 조금 애를 먹기는 했다. 도심공항 서비스 전용 출국장은 맨 안쪽에 있었던 탓도 있겠으나, 괜히 긴장해서 더 못 찾았던 거란 뒤늦은 결론. 시간이 조금 지나니, 우리가 부치고 온 수하물이 안전하게 입고되었다는 안내도 대한항공 어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야 뭐, 인터넷 면세점으로 주문해 둔 물건만 찾으면 되었고, 엄마와 아빠는 애초에 쇼핑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보니 자연히 곧장 라운지로 향한 우리. 비행기 안에서 사육당할 거 뻔히 알면서도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지라, 셋이서 각자 접시를 하나씩 가득 비웠다. 것도 모자라 나는 평소에 좋아하기는커녕 입에도 잘 대지 않는 컵라면까지 먹어치웠다는. 시작의 시작점이 코앞으로 오면 유난히 시간이 더디게 간다. 휴대폰도 만지작 거리다, 잠깐이나마 쪽잠을 노리다, 커피나 한 잔 더 마시다가. 그렇게 오매불망 출국 시간을 기다렸다.
사실 우리 여행의 최초 일정은 우리 의지가 아니었던 면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마일리지 때문이었다. 워낙에 출장이 잦았던 아빠의 마일리지가 상당하기도 했고, 나도 여행 한번 거창하게 가보겠다며 제법 억척스럽게 마일리지를 모아 온 터라, 셋이서 프레스티지석을 예매하기에 충분한 마일리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너스석 세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일정에 맞춰진 여행지 선정이었달까?
그렇게 불편함이 덜 한 비행이 가능해진 우리는 저마다의 11시간을 보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도착해서 어떻게든 시차를 맞춰보겠다고 단 한숨도 자지 않기를 선택했는데(도착 즉시 공연 일정이 줄을 서 있었으므로 걱정이 몹시 컸다), 덕분에 매튜본 <호두까기 인형>,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튼 아카데미, 괴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영화 퍼레이드. 바튼 아카데미가 가장 좋았고, 괴물에서 오퍼스로 넘어가니 더 좋았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관에서 안 본 게 새삼 아쉬웠고, 5월의 매튜 본을 더욱 기대하게 됐다. 그렇게 코로나 이후로 영화관과 멀어지면서 미뤄둔 영화를 몰아봤는데, 솔직히 연속 다섯 편은 상당히 피로한 일이었다. 마침 가벼운 영화들이 없었던 탓인지, 긴 여행 앞두고 생은 뭐니, 인간은 대체 뭐니, 하느라 괴로웠다는.
아, 식사의 경우에는 나로선 정말 고역에 가까울 정도로 거창했다. 나는 애피타이저에서 벌써 배가 불렀는데, 메인요리 갖다 주는데 거절할 뻔. 결국 몇 입 못 먹고 수저를 내려놨더니, 승무원 분이 찾아와서 "혹시 입맛에 너무 안 맞으신다면, 다른 메인 요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하셨다. 어흑.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디저트도 치즈와 견과를 와인 한 병은 때려 넣어야 할 것처럼 한가득 주셔서 이 또한 거의 손을 대지 못하였다고 한다. 결국 다음 식사 때에는 애피타이저 까지만 달라고 부탁드렸고, 이건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래도 여전히 존재하는 출발의 설렘 덕분에, 또 처음 이용해 보는 편한 좌석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비행시간을 보내고 비엔나에 무사히 도착. 비엔나 도착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는데, 또다시 SkyPriority 찬스로 짐을 금방 찾아 빠르게 입국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땅에 발을 딛자 어쩐지 급격히 가이드의 부담에 휩싸인 나는 미리 출력해 둔 숙소 바우처를 손에 쥐고, 택시 승강장으로 돌진. 사실 이 정도 루트는 길치가 긴장할 정도의 난이도는 아닌 터라 어렵지 않게 택시를 타고 숙소 앞으로 도착했다. 다. 만. 사실 나는 한국에서 미리 airport to city로 픽업 택시를 예약해 두었다는 것. 정말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얼마나 긴장했던 건지 어이가 없을 뿐. 나를 위해 공항에서 너 어디냐며 문자를 기다린 기사님은 여행 일정을 통틀어 가장 미안한 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해가 뉘엿뉘엿해서 더 아름다운 모습을 한 비엔나에, 며칠간 우리를 아늑하게 품어줄 보금자리에 무사히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