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이 꿈꾸는 사회
누군가 "당신은 어떤 사람 인가요"라고 묻거나 "내가 보니,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언할 때면 상당히 당황스럽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하고 살아봤나'부터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의 가사까지 머릿속이 막 엉클어질 때가 많았다. 좀 더 젊었을 때는 질풍노도의 시기라 나도 나를 잘 몰라서 끌리는 데로 살아왔건만, 어느 덧 나이가 더해지면서 프레임이라는 것이 생겨 세상을 보는 생각이나 태도가 만들어졌기에, 나를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요즘은 나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도 곧잘 설명의 한계에 부딪히곤 했는데 적합하게 나를 설명할 포괄적이면서도 명확한 단어를 찾는데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명확한 단어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미당 서정주는 스물세 살의 어린 나이에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썼는데, 그보다 나이가 더 먹은 나를 만든 건 비단 바람만은 아니었을 거다.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기질의 발현일 수도 있겠고, 커나가는 과정에서 들어온 환경의 작용이기도 할 것이다. 때론 읽은 책을 나침반 삼아, 때로는 경험으로 길을 찾아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겠지 싶다. 그러한 총합으로 독특한 내가 만들어졌을 것인데, 이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자니 난해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문유석 판사가 쓴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나서부터다. 이 책에는 묘하게도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생각, 내가 가진 프레임과 거진 겹쳐있다. 내가 설명하고 싶어 했던 나의 가치관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닮아있어서 놀랍기까지 했다.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어떻게 내가 했던 생각들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지?' '내 생각은 이래. 내 가치는 이런 거라며 침 튀기며 설명했던 것들이 책으로 어떻게 정확히 담겨있을 수 있지?'라는 그 경이로움과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본적으로 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며 살아가려 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러하기에 나 역시도 나의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것이 생각의 출발점이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생존 기계'라는 과격하고 도전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난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믿는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나는 내 행복이 최고로 소중한 가치이다. 그래서 나는 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의 해결점에 도달했었는데, 결국은 나 자신의 행복, 또 그것을 만들기 위한 인간 본성으로서의 자유의지가 나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일 테고, 내가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제약하거나 침해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나에게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거다. 우리 모두는 다 다양하고 각각의 주체적 인간이다. 이 세계는 서로 다른 인간들이 한 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어울리는 곳이다. 나는 이곳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알겠다. 그런 것이 있다고 서로 인정하자. 대신 난 이런 사회에서 더 나아가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할 것이다. 내 생각과 달라 싫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그런 차이를 인정하고 나는 내 자유대로 내 의지에 따라 신념에 따라 살 테니 너는 너 살고 싶은 대로 살라는 것이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나 권리를 침해한다면 나는 내 생각을 수정하고 때로는 거둘 것이다. 그러니 너 역시도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주입하지 말라. 뭐 이런 것들.
다행히 우리 인간들은 혼란의 시기를 겪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최선책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쯤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수가 인정하고 합의할 수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그게 역사의 진보라고 칭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계를 그대로 두면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어버리고, 강한 누군가가 모든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 속에서 나 개인은 이기심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내 자유가 제약당할 테니 그리 하지 말고 서로 이기심을 조금씩 양보하고 시스템 속에서 합의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며 살아가자는 것, 나는 그것이 민주주의 제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난 너와 나는 다르다는 전제 위에서 삶을 살아가며, 내 삶 속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를지라도 정답은 없는 것이고, 그건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신념이고 생각 체계일 테니 다를 수 있는 것이라고 반복해 되뇐다. 아직은 미숙할지라도 그러한 훈련의 반복은 꽤 효과가 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나는 너를 강제할 권리도 힘도 없거든. 다만 이것만은 지켜줘. 그러하기에 너 역시 나에게 피해주지 않는다는 것!' 나는 이러한 생각이 많아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믿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들이 가득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그렇다. 단 조건이 있다. 이런 개인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의 중요하다. 개인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내 생각을 소중하기를 여긴다면 응당 타인의 생각도 소중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야 내 생각이 가치로워질테니. 이런 토대에서 토론을 하고 대화를 하고 양보를 한다면 생각들의 접점을 찾을 것이다. 내가 진보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보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는 그 신념을 존중한다. 다만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니, 토론의 장으로 나와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비겁하게 뒤로 숨어서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 말고!
만약 이 틀을 깬다면 분노하는 것이 맞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내 생각을 꺼낼 틈도, 시간도 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내 자유의지를 네가 뭉개고 나에게 피해주고 있으니 불합리한 것이다. 이럴 때는 토론을 하든, 투표를 통해서든, 글쓰기를 통해서든, 집회를 하든 자신의 성향과 환경에 따라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각 개개인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 서로 다르지만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려는 같은 목적을 지닌 우리들에게는 연대가 필요 조건이 된다. 그래서 내 생각을 강제하거나 생각을 꺼낼 틈을 주지 않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판을 뒤흔드는 행위는 반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개인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문유석은 책에서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p23)라고 말하며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꿈꾼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과 사람 사이의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들은 이런 합리적 개인주의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p25)는 생각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 정리하자. 예전에는 위의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고 나름의 내 성향과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면서도 밖으로는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자칫 이런 개인주의적 성향이 집단 논리 속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발전을 저해하는 위해 행위로 보일 듯해서였을 것이다. '굳이 따가운 시선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뭐가 있나'라는 생각부터 ' 누군가 나를 정확히 알게 할 만큼 나의 시간과 여력을 소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책으로 많은 위안을 얻었다. "불현듯 알고 보면 나와 비슷한 별에서 온 사람들이 꽤 많은데 단지 목소리 큰 사람들 사이에 묻혀 눈에 안 띄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용기를 내어 더 솔직하게 내 생각들을 털어놓기로 했다."(p13)는 말이 얼마나 공감이 가고 나에게는 힘이 되었는지.
이제 내가 나를 설명할 포괄적이고 명확한 단어를 찾았으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어졌다.
"합리적 개인주의자"
맞다. 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 이어야 한다!
* <개인주의자 선언>은 판사 문유석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 프롤로그를 읽다 감동에 주체할 수 없었다. '내 이야기인데 이거?'
*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이 있다(p19)는 말 참 멋지다.
* 총 3부로 구성하여 크게는 개인, 타인,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으로 나누어 글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