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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서C Apr 14. 2017

열한 계단

불편한 지식의 계단을 오르는 것

[인문] 열한 계단 / 채사장 / whale books


1.

우선 책을 읽기 전에 채사장의 지대넕얕 팟캐스트를 들어보자. 지대넓얕은 다양한 방면의 주제에 대해 4명의 패널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방송인데, 채사장은 이 방송의 패널이자 진행자를 맡고 있다. 방대한 양의 방송을 정주행을 하고 나면 채사장이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길 거다. 그럴 때에 맞춰 그가 쓴 책을 읽어보면 채사장이 가진 생각들이 쏙쏙 들어오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루트를 밟아야 <열한 계단>이라는 책도 상당히 흥미로워 보인다.


2.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지는 작가다. 요즘 핫한 작가이니 독자층도 제법 두껍다. 그 핫함을 바탕으로 요즘 날고 있다. <지대넓얕>도 그렇고, <시민의 교양>도 그렇다. 인문학을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게 할 수 있는지 아는 작가다. 내가 생각하는 채사장의 가장 큰 장점은 생각할 거리를 최대한 후려쳐서 단순화시킬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선과 악, 경제사, 정치사 등을 사족을 빼고 최대한 담백하게 만들어 설명한다. 물론 이 세계는 우연과 필연, 욕망과 절제, 이성과 감성이 버무려져서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이어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자칫 세상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잡다한 소용돌이 속에서 핵심 개념도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많기에 이런 채사장의 단순화 과정이 상당히 유용하다. 더욱이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알기 쉽게 포장하는 능력까지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3.

방송을 듣고 그의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쯤에서 궁금증이 든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아니다 어떠한 과정으로 그런 생각과 재능이 만들어졌기에 글을 이렇게 대중이 좋아할 입맛에 맛게 쓰나? <열한 계단>에서 저자는 스스로 밝힌다. '그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말이다. 지금의 채사장을 만나려면 총 열한 계단을 올라야 한다. 사람마다 취향과 관심 분야가 달라서 계단을 이 책 계단처럼 차근차근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계단을 순서대로 밟아 올라가면 저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쉽게 만나겠지 싶다.


4.

계단의 순서, 즉 책의 차례는 이렇다. 문학이라는 단계로 독서에 눈을 뜬 저자는 종교의 세계를 만나다. 그 과정에서 종교의 구원과 믿음 사이에서 안식하기도 하지만 질문이 싹튼다. 절대자적 존재를 벗어버리고 인간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그를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관심 분야를 돌리게 된다. 철학이 그것인데, 철학은 그를 삶의대지로 옮겨 놓는다. 문제는 종교와 철학 둘 다 주관적 세계라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객관적 실재라 불리는 과학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과학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이상적 세계를 불러온다. 정확함을 수치화하는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이 명확하다. 문제는 그렇게 다가가다 보면 인간사에서도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데  있다. 그래서 이상주의라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세상은 이상적이지 않다. 세상은 바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그러하기에 현실에서의 변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사회인이고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대부분은 여기까지 계단을 딛는다. 나도 돌아보면 불완전하지만 한 발, 한 발  여기까지는 오른 것 같다.


5.

다음 계단부터는 죽음과 삶, 나와 초월이라는 현실 너머의 세계의 계단이 있다. 이 계단부터는 저자의 지향점이 보인다. 비록 확인할 수 없지만 알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계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부터 가독률이 떨어졌다. 알 수 없는 것을 손에 쥐어 보려는 마음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 책 부제 문구인 '불편한 지식들'을 외면하고 싶어서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 계단은 같이 오르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느릿느릿 게으르게 책을 읽었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고 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겠지.


6.

궁시렁거리면서도 계단을 다 올랐다고 보니, 어라, 더 많은 계단이 앞에 뻗어 있는 듯하다. 일방향적 계단이 아닌 순환하는 계단. 계단은 뫼비우스 띠 같은 것이어서 그 계단이 다시 문학이고, 철학이고, 과학이고, 이상이고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계단은 끝이 없는 것이어서 결국 또 올라야 한다. 그게 불편할지라도. 그와 함께 오른 열한 계단은 채사장인 저자도 그렇고 '나'라는 독자도 그렇고,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읽으면서 무장했다. 아니다 읽으면서 여행할 채비를 챙겼다고 해야 맞겠다. 다시 나도 나만의 계단을 올라갈 준비를 해야겠다. 책을 나침반 삼아, 세상을 같이 오르고 있는 동반자들과 함께, 힘껏.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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