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능소화

by 일향지

벤치 앞에 엄마와 아저씨가 서 있다. 여자가 집으로 걸어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멈춰 지켜본다.


아저씨 (엄마에게) 내가 애들 문제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정리되면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요.


눈물을 흘리는 엄마가 아저씨에게 편지를 건네고 떠난다. 아저씨가 편지를 꺼내 읽으려고 하는데... 여자가 등 뒤에서 쏘아붙이는 소리에 황급히 편지를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여자 돌아가신 아내 분께 죄스럽지도 않으세요? 두 여자 오가면서 장난치는 거 좀 그만..

아저씨 (말 자르는) 나도 그녀도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지난 10년을 넘게 시달렸어요.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은 진심이오.

여자 ..

아저씨 그리고 이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여자로서 한 번도 남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여자 (뭔 소린가 싶은)...

아저씨 아버지가 평생토록 사랑한 여자는 따로 있었어요. 당신 엄마가 아니라.

여자 (듣기 싫은) 그렇다고 남의 가정을 깨는 게 정당화될 수 있나요? 그만, 가시죠!


여자가 뒤돌아서면, 아저씨가 더 이상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퇴장하는데, 퇴장하면서 주머니에서 엄마가 준 편지가 떨어진다. 여자가 그 편지를 주워들고 읽는다.


엄마(E) 이 편지가 제가 전하는 마지막이 되겠네요. 우리 때론 동반자처럼, 동지처럼... 연인처럼... 힘든 세월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며 살아왔는데... 내가 없더라도 너무 슬퍼하진 마세요. 저 세상에서 늘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테니... 저를 많이 좋아해줘서 고마웠습니다. 당신은 제게 구세주였습니다. 남편이 있던 날에는 무참히 짓밟힌 여자로서의 나를, 남편이 없던 날에는 홀로 남겨진 인간으로서의 나를 구제해주었으니 다만, 안타까운 게 있다면, 그 오랜 세월 당신을 사모하면서도 우리 서로 마음껏 즐거울 수 없었다는 것. 당신의 여자로 사는 것이 이번 생에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 이 생애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지만, 다음 생엔 반드시 당신의 연인으로 함께하길 바라겠습니다.

멍하니 편지를 바라보고, 힘이 빠진 채 고개를 숙이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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