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나에게 - 명품 가방이 아닌 '명품 인간' 이 될 수 있을까
"이번 생일에 멋진 가방 하나 사줄까?"
"응? 가방? 갑자기 가방은 왜?"
딸의 입학을 앞둔 3년 전 어느 날인가, 남편은 뜬금없이 가방 타령이다.
"슬이 입학하면 엄마들 모임도 생길 거고, 여자들은 명품 가방을 들어야 기 안 죽는다며?"
"자기야, 여기 강남 아니야. 그리고 자기는 와이프를 그리 모르나? 필요했음 벌써 신용카드님 6개월 할부로라도 쓱쓱 긁어서 샀을 거야. 같은 단지에 사는 엄마들 만나면서 된장녀 코스프레 할 일 있어? 명품가방 비 맞을까 안고 다니는 코미디는 하기 싫은데?"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오늘따라 이 남자가 왜 이러지. 여직원들이 하는 말을 들었구먼.
"그래도 동창회라도 가고 하면.."
"그런 걸로 잘난 척 대회하는 동창들이면 난 안가. 그런 애들은 친구 아니지."
"혹시라도 필요하면 얘기해. 그 정도 능력은 되잖어. 내 아내가 어디가서 기죽는 건 싫다."
"오늘따라 왜이리 멋진 척이지? 알았어. 그래도 그런 말도 해주고 고마워."
명품 가방 얘기를 하면서 오래전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날 있었던 씁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는 집을 떠나 대학 4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던 딸에게 좋은 정장을 한번 사주시겠다며 괜찮다는 내 손을 끌고 시내에 있는 브랜드 옷가게를 찾아갔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백화점이 없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뭐가 그리 귀찮은지 건성건성끼가 뚝뚝 떨어지는 마른오징어 같은 목소리라고 잠시 생각했다.
"우리 아가 이번에 졸업을 하는데 인자 회사 들어가려면 면접도 봐야 되고, 정장을 사야 돼서."
엄마가 점원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뭐 예쁜 옷이 없나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느라 열 일이었다.
"엄마, 나 이거 맘에 드는데?"
"이거는 얼마예요?"
그 순간 차라리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그 점원이 우리 엄마를 아래, 위로 훑어보는 기분 나쁜 시선을.
"그거 좀 비싼데.."
"비싸면 얼마나 비싸길래? 얼마예요?"
'엄마 그냥 가자. 제발..'
"엄마, 됐어! 나 여기서 안 사. 우리 나가자."
그렇게 엄마의 손목을 잡고 힘껏 끌어당기며 밖으로 나갔다.
"엄마, 엄마도 이제 그 낡은 가방 좀 그만 들고 좋은 걸로 하나 사! 사람들이 무시하잖아!"
엄마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는데.. 아니 엄마에게 화도 났었다. 다른 엄마들은 잘도 꾸미고 다니더구만. 그렇게 가난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꾸밀 줄을 몰라 저깟 젊은 점원 가시나한테 무시나 당하는지.
"괜찮다. 저 가시나가 사람 볼 줄 모르네. 진짜 부자들은 도둑놈들 무서워서 일부러 좋은 가방 안 들고 다닌다 아이가. 엄마가 오늘 니 옷 사줄라고 30만원 현금으로 딱 넣어가 왔는데, 돈 냄새도 못 맡고 저래가 장사하겠나."
진짜 못 말리는 우리 엄마다. 딸은 눈물이 그렁그렁 속상하다 못해 속이 터질듯한 마당에 농담이라니. 자기를 그렇게 경멸하듯 무시하는 눈으로 쳐다본 사람을 지금 걱정하는 거야?
어른어른 솟았던 눈물이 그만 쏙 들어가 버렸다.
여섯 자매 중 큰딸이었던 엄마는 검소하고 알뜰한 살림살이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노름에 빠져 가족을 나 몰라라 하신 탓에 쌀장사를 하신 외할머니를 대신해 다섯씩이나 되는 동생들을 보살피며 살림을 도맡아 하셨단다.
그래 다 좋다. 그땐 그랬다 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없이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왜소한 체구에 화장기까지 없는 엄마의 얼굴은 딸인 내가 보기에도 속된 말로 '없이' 보였다. 시골서 자란 탓인지 잡티와 점이 많은 것도 한몫을 했다. 화장이라도 조금만 하면 훨씬 나았을 텐데 엄마는 '뭘 뿌옇게 찍어 바르는 게 답답하다' 고만 하셨다.
"나는 애미들이 지만 뺀들뺀들 꾸미고 다니면서 지 아는 씻기지도 않고 신경 안 쓰는 거 별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녹음 멘트와 함께. 이 여사의 막무가내 철학이란..
결국 그날 옷을 사지 않고 엄마 옆구리에 팔짱을 꽉 끼고 시장을 돌다 장을 보고 집으로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와 '명품 가방' 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묘사되곤 한다. 남자 친구에게 명품 가방을 사달라고 조르는 여자 친구 얘기, 명품가방과 짝퉁을 구분하는 법 등 오죽하면 개그프로 단골 소재이기까지 할까.
사실 난 명품을 잘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관심이 없으니 알리가 없다.
여자들은 명품을 좋아한다는데 너는 왜 관심이 없냐고 누가 묻는다면 '우리 엄마 닮아서' 라고 말할 거다.
정말이지 가방인지 상전인지 비가 오면 젖을까 모셔야 되는 그런 가방 사는데 쓸 돈이 없다. 엄마는 '프라다' 보다는 '편하다'를 선호하기 때문인다.
아직은 아이와 함께 나들이할 때도 이것저것 넣을 수 있는 백팩이 편하고, 막 빨아도 되고 편하게 넣을 수 있는 에코백이 편하다.
그렇다고 결혼식 같은 중요한 장소에 들고 갈 가방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냥 합리적인 가격에 좋아하는 컬러와 재질의 가방이면 족하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가족들이 뭘 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내가 사고 싶은 것보다 아이가 사고 싶은걸 먼저 보게 되는 게 엄마 마음이라는 거, 꼭 아이를 낳아보고야 알게 되는지..
그때도 이런 마음을 알았더라면 엄마를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을텐데...
요즘은 친정에 가면 엄마의 옷장을 몰래 검사해 보곤 하는데 그리곤 또 혼자 웃는다. 몇 년 전 남동생이 결혼하면서 신혼여행에서 사 온 명품 가방 - 몇 백 짜리는 아니지만 - 이 고스란히 장식되어 있는 걸 보고.
"엄마! 이거 좀 들고 다니라니까는!"
"시골에서 그거 들고 뽐낼 일이 뭐 있노?"
우리 엄마는 아무도 못 말린다. 그녀는 '명품 인간' 이다.
엄마는 프라다를 들지 않는다
'편하다'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