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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Nov 27. 2023

카투사, 그리고 통역

2018년 2월에 쓴 글

2003~2005년 내가 카투사 생활을 하던 성남 서울공항과 울타리를 함께 쓰는 미 항공여단은 당시 유일한 한측 간부였던 지원대장 -지금의 나, 그때 당시 내가 카투사 지원대장이 되는 것은 지금도 내 선후임들 간에 회자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군생활을 계속하려고 카투사 입대하는 인원은 없으니까- 의 퇴근 후에는 자는 시간까지 병 체계에 의해 돌아갔다.


 그 당시 일반 한국군 부대는 분대장을 제외한 병 상호간 간섭 및 지시를 금지하는 이른바 수평적 관계의 정착이 붐이었지만, 선진국의 군 시스템을 갖춘 미군부대라는 영토 안에서 따로 떨어진 외딴섬 같이 카투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더 확실한 군기를 바탕에 둔 선후임 관계가 존재했다.

- 나중에 알았지만 사람의 인격을 짓밟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제도 자체는 나쁘지만 그것에서 복종과 자기 부인을 배우는 것은 분명 인생에 있어 필요하다.


이렇게 나는 군의 계급 사회를 배워 갔고 동시에 미측 상급자에게는 배운 대로 parade rest(열중쉬어)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Yes, (first) sergeant! 을, pushup을 시키면 이유를 막론하고 상급자 입에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했다.

이후 체력적으로도 미군보다 우위에 있게 되고 PLDC(이후 WLC, 현재는 BLC; 미 부사관학교)에 가서 높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NCO(부사관)의 지위에 있게 되자, 내 말에는 그에 걸맞은 힘이 실리게 되었다..

많은 미군 NCO에게서 훌륭한 리더의 모습을 봐왔기에, 그랬다 하더라도 그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안에 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 것에서 보람을 찾게 되면서 진정 리더십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게 내 적성이라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졌고, 이 일을 위해 내 청춘을 바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본인이 미군과 함께 생활함에도 불구하고 반미감정이 격해진 후임들을 향해 자격지심과 우월감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설명하면서 미국 사람의 입장을 설명하고 미묘한 한국의 정서를 미군에게 설명해 주면서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고, 결국엔 두 민족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면 언어가 달라도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05년 육군 하사 임관 이후 6년간 기계화보병사단 사령부에서 1만 명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급식출납관 역할을 하며 세심한 병과 전문성을 보완 발전시켰고, 이후 3년 동안 카투사 36개 기수를 훈육하는 카투사 교육대(KTA) 교관으로서 군생활의 - 실은 한시도 꿈꾸지 않은 때가 없던- 첫째 목표를 이루었다.


 교관의 역할은 육군훈련소 5주를 거친 훈련병들을 퇴계원역에서 픽업하여 의정부 캠프 잭슨에서의 3주 과정 후 수료시킬 때까지 미군부대 훈련소 스타일 그대로 미군 증원요원(KATUSA; Korean Augmentee To United States Army)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훈련시키는 실로 뼈를 깎는 고된 직책이라 자부한다.

매일 새벽 4시 기상하여 아침, 점심, 저녁 식사시간 합쳐도 30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미군부대의 모든 것을 맛 보여준다(모든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그때 당시는 그런 것처럼 가르친다).


이때는 미측 교관과 한측 교관 서로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정말 피곤하고,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돼야 3주간의 사이클이 차질 없이 돌아간다. 카투사 시절에는 리더십의 맛을 보았다면 교관 시절에는 진정한 리더가 되는 길의 쓴맛과 단맛을 다 봤다. 이 때는 미군들과 많은 마찰과 자존심 대결이 있었다. 그만큼 공을 들이고 심혈을 기울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 싸우다가 결국에는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고 미군 교관을 끝내 미국으로 보낸 뒤 추억을 나누며 후일에 다시 연락이 된 경우 등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미국사람과의 관계도 한국사람과의 관계도 결국엔 같은 문제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고, 자존심만을 내세운 내 불같은 성격 때문에 보이지 않던 근본 마음을 보는 연습이 되었다.


교관 생활 후에는 실질적인 카투사가 소속되어 있는 부대의 지휘관과의 조율 및 협조를 하는 현재 지원반장(예전의 지원대장) 3년 차다. 이는 그저 단순한 조율이 아닌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정서와 문화를 양쪽에서 대변해 주는 역할로 실로 한미연합의 중간자 역할 또는 군사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이다.


통번역은 그저 문자를 다른 나라 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닌 그들의 감정을 공감하고 해석해서 상대방과 함께 소통하는데 그 짜릿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여태까지 배워온 섬기는 리더십의 조용하지만 힘 있는 표현이자 잘 보이지 않지만 한결같고 겸손히 존재의 울림을 주는 통번역사의 기질이라고 여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연두색 떡잎이 까만 땅에서 고개를 내밀듯 그 찬란한 순간이 오기를 나는 또 와신상담하며 기다린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러하였듯.


겸손한 자세로 통역을
육군주임원사 통역을 맡다보니 말을 많이 해야했다
육군주임원사님과 미부사관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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