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 16_취향의 견지

취향의 발견보다 어려운

by 달을읊다

20대 초반의 나는 취향이 매우 굳건한 사람인 줄 알았다. 옷은 검은색, 머리도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 다소 우울한 내용의 서사, 하지만 끈적함 보다는 차라리 냉랭한 건조함을 추구했다. 문장도 최대한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드라이함, 깊이, 우울, 그런 게 나의 취향이라고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 지금 우리 집에는 베개만 한 무민 인형이 있다. 테이블 위 간식 바구니 위에는 바람을 넣은 라이언 비치볼이 있고, 그 위에 GKBF 당시 스톤 브루잉에서 준 가고일 마스크가 얹어져 있다. 벽에는 라라랜드 포스터를 패러디해서 주인공들을 뚱냥이로 바꾼 포스터가 붙어 있다. 망원동에 있는 보틀샵 위트위트에서 맥주 3만 원 이상 사고 사은품으로 받았다. 내 노트북의 오른쪽에는 남자 친구가 태국 갔다 오면서 사준 녹색의 아기 코끼리 인형이 있고, 왼쪽에는 따봉 포즈를 하고 있는 선인장 보석함이 있다. 플라잉 타이거에서 산 것이다. 뭘로 보나 드라이함, 깊이, 우울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다.


책만 하더라도 학교 다닐 때는 인문 서적이나 에세이조차 거의 읽지 않았다. 오로지 소설이었는데 그나마도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많지 않다. 한동안 심리학 서적을 주야장천 보다가, 잠깐 강신주의 책을 보고, 불교에 대한 책을 조금 찾아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책에 대한 책이 주 관심사다. 책장을 보면 알라딘과 교보문고에서 굿즈와 함께 사 모은 갖가지 책들이 있고, 대부분 다 읽지 못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도 취향이 확실해 보이고, 자신이 취향이 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멋있다. 취향이 확실하다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하지만 내 취향을 견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고작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유행하는 패션과 음악과 이야기와 프로그램 포맷이 생산되는 시점이라면 더 그렇다. 어디까지가 장사치의 사탕발림인지, 어디까지가 존중할만한 취향인지 기준선도 모호하다. 그 와중에 나와 나의 취향, 그리고 지갑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의 취향이 드라이함, 깊이, 우울에서 네 발 달리고 털 달린 귀염둥이들과 위트 있는 장식물로 바뀌는 동안, 내가 그저 시류에 따라 분별하지 않고 흐물흐물 흘러온 것만 아니길 바랄 뿐이다.



커버 사진은 위에 언급한 라라랜드 패러디 뚱냥이 포스터이다. 위트위트에서는 이제 굿즈샵도 겸한다고 하니 이번 주말에 다녀와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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