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부터 2018년 봄까지 상암동에서 자취했다. 집은 상암동의 상가들이 밀집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회식하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정말 고요했고, 공원도 한강도 가까워서 만족하고 살았다. 놀러 나갈 때는 주로 망원동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술집이 있었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걸어서도 갈 법한 거리였기 때문이다. 망원동에는 종종 찾던 카페가 있다. 추리소설 전문 북카페, '카페 홈즈'라는 곳이다. 그곳은 망원동의 '힙'함이 침범하지 않은 거리 2층에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면 나무로 된 테이블과 책장이 보였고, 책장에는 한가득 국내외의 추리 소설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은행나무와 별 특색 없는 맞은편 상가가 보였다. 나는 종종 창가 자리에 앉아 책장에서 골라온 책을 읽거나, 가져온 책을 읽거나, 눈이 오길 기다리며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낮에 가면 추리소설 속의 유명한 탐정 이름에서 따온 커피를, 저녁에는 따뜻한 초콜릿 라떼를 마시며.
이 카페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읽은 내용을 보니 봉준호 감독도 단골이었다고 하고, 요 네스뵈도 들렀다고 한다. 게다가 '카페 홈즈'를 배경으로 하여 네 명의 작가가 집필한 소설집, ⌜카페 홈즈에 가면?⌟이라는 책도 있다. 카페에서 작가들에게 의뢰한 책이 아니라,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카페 홈즈'를 위해 쓰고 엮은 것이다. 아직 이 책은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이 공간이 국내의 추리소설 작가들에게 어떤 의미와 위상(?)을 차지하는 곳이길래 책까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페 홈즈'의 사장님도 분명히 이 책을 읽어 보았을 테고, 그 책에서 묘사하는 이 공간의 분위기와 사장님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아마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을까.
이와 비슷한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1979년 4월 13일 - 13일의 금요일이었다고 한다 - 에 문을 연 뉴욕의 추리 소설 전문 서점인 '미스터리 서점'을 배경으로 한 소설집이다. 이 책이 앞의 ⌜카페 홈즈에 가면?⌟과 다른 점이라면 서점에서 직접 1)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2) 미스터리를 포함하여 3)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이 등장하도록 작가들에게 의뢰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쓰인 작품들은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미스터리 서점'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소책자 형태의 선물로 제공되었다. 그렇게 열일곱 편을 모아 만든 책이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다. 비록 서점 측에서 의뢰한 소설이기는 해도, 작가들은 기꺼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미스터리 서점'과 그 서점의 주인이자 편집자 오토 펜즐러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서.
고백하건대 나는 추리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 에드거 앨런 포도, 셜록 홈즈도, 애거서 크리스티도 거의 읽어본 작품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편견없이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같은 장르로 묶어도 괜찮은 걸까 싶을 만큼 다양했다. 한 편 한 편을 맛있게 읽어가며, 나는 나의 추리 소설 취향이 어떤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시니컬한 유머가 있으면 좋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사건이 발생하며, 이 사건의 트릭을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로 루퍼트 홈즈의 <긴 겨울의 한잠>이라는 소설이었다.
"셜록 홈즈가 라라 크로프트를 만나는 것도 있어요."
"라라 크로프트? 홈즈가 143세까지는 살아야 가능한 얘기군. 그래, 그 작가는 어떻게 그걸 가능하게 했지? 뭐 시간여행이라도 하나?"
"아뇨, 소설에는 홈즈가 143세로 나와요."
"음, 그것도 한 방법이겠군."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긴 겨울의 한잠> 중에서
이 소설 속의 '미스터리 서점'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분주하다. 매해 크리스마스에는 서점 주인 오토 펜즐러의 주최로 미스터리 작가들과 친구들을 불러 서점에서 파티를 연다. 직원들은 파티 준비는 물론이고 크리스마스를 위한 서점 데코레이션, 그리고 서점 앞에서 음악을 연주해 줄 사람들을 구하는 일도 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토 펜즐러가 읽어 주기를 희망하며 아마추어 작가들이 보낸 원고 더미도 한가득하다.(위의 인용은 그런 원고 중 하나에 대한 내용이다.) 크리스마스 파티는 무르익고, 밴드는 악기를 연주하고, 그리고 지하실에서는 직원 중 한 명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살해된 채 발견된다. 그의 산타 복장 안에는 다이어트에 관한 페이퍼백이 가득 들어 있다. 경찰을 기다리는 10여 분 동안 오토 펜즐러는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누가 산타를 살해했는지 밝혀내는데... 이 사건의 전말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이 소설의 초반에는 오토 펜즐러에 대해 다소 장황한 묘사가 나온다. "그러니까 보스는 과거를 거치고 거쳐 여기에 와 있고, 기사도, 용맹, 충성심, 번뜩이는 지혜, 명예는 물론이고, 삶의 기쁨과 고통이 풀리지 않는 추리소설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리라는 것까지 모두 기억하고 염두에 둔 채 우리 사이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소설 속의 인물과 실존 인물에는 차이가 있을 테지만 이 대목을 쓸 때 작가는 분명 실존 인물인 오토 펜즐러를 떠올렸을 것이며, 그를 멋지게 묘사하는데 기쁨을 - 적어도 짓궂은 즐거움을 - 느꼈으리라. 이 소설을 포함해 다른 작가들이 그리는 '미스터리 서점'은 무척 우아하고 멋진 공간이며, 오토 펜즐러는 지적이고 한편으로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것이 작가가 그들을 품어준 곳에 대해 애정과 감사를 표하는 방식이었으리라. 그 이야기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 비록 미스터리 소설임에도 - 이 책이 정말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좋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 서점'은 현재 뉴욕 워런가 58번지에 건재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망원로 73 2층에 위치하고 있던 '카페 홈즈'는 지난 2021년 1월 20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웠던 시기였고, 근래 망원동의 인기로 인해 임대료가 과연 얼마나 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상암동을 떠나온 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공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해도 40km 너머의 그곳을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뒤늦게 '카페 홈즈'의 폐업 소식을 알게 된 나는 무척 마음이 아팠다. 아직 그곳에서 눈 오는 풍경을 보지 못했는데. 커피 맛있게 마셨다는 말도, 마음에 맞춘 것처럼 안락한 공간이라 매일 오고 싶다는 말도, 아무 것도 전하지 못했는데.
당신에게는 잠시 몸과 마음을 쉬어가는 아지트가 있는가? 코로나 때문에 자주 찾지는 못하더라도, 그곳 간판을 보고 'OPEN' 사인을 보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장소가. 이번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잠시라도 그곳에 들러 인사를 건네도 좋겠다. 물론 커피 한 잔, 책 한 권, 혹은 술 한 잔을 주문하는 것도 잊지 말고. 당신의 아지트가 이런 시절을 잘 견뎌줘서 고맙다. 조금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 본다. 뉴욕의 '미스터리 서점'과 한때 카페 홈즈라는 멋진 공간을 운영해 주셨던 사장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북스피어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8116976
카페 홈즈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cafeholmes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