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꽤나 터프한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오늘은 늦잠을 잤다. 눈을 뜨니 11시였다. 보통 토요일 오전에 운동하러 헬스장에 가는데 어제 일정 때문에 가지 못했다. 오늘이라도 가야겠다는 의무감은 들었지만 몸이 영 피곤했다. 하루 쉴까 고민하며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어째 물 나오는 게 조금 시원찮았다. 다시 한번 버튼을 눌러봤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다. 정수와 온수로도 바꿔 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싱크대와 세면대, 샤워기의 물을 모두 틀어 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망했다. 단수인 모양이다.
휴대폰으로 이 동네 단수 관련 기사가 있는지 보았는데 그런 내용은 없다. 바깥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도 항의하는 소리도 없다. 우리 집만 물이 안 나오는 건지 동네 전체적으로 안 나오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집주인은 외지인이라 집에 문제가 있으면 부동산으로 연락하라고 들었는데 하필 일요일이다. 일단 씻기 위해서 헬스장에 가기로 했다. 다행히 2리터짜리 탄산수 하나가 냉장고에 있었다. 그 물로 양치를 하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머리에는 대충 물만 바르고 적당히 드라이를 했다. 덕분에 조금 추레하지만 사람 형상을 하고 집 밖에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사는 건물은 대략 여덟 가구가 사는 빌라이다. 문 밖을 나섰는데도 그 여덟 가구가 모두 빈 것처럼 조용했다. 일요일에는 모두들 일찌감치 외출을 하는 걸까? 우리 집 문이나 건물 현관에도 단수를 안내하는 글은 없었다. 정원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된 수도가 있어 틀어 봤다. 꾸르륵거리는 소리만 나고 물은 나오지 않는 게 우리 집과 상태가 똑같다. 적어도 이 건물 전체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 상태임을 확신했다. 이사올 때 이 집 3층에 집주인의 친정어머니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문제가 있으면 아마 그분이 해결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를 하며 헬스장으로 향했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랗고 햇살은 눈부셨다. 새 우는 소리만 요란하고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 평온하다. 어쩐지 뭔가 단단히 속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헬스장에 다녀오는 길에 정원 수도를 틀어보니 힘차게 물이 나온다. 집에 들어가서도 물을 틀어보니 잘 나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빨래를 돌리고 환기도 시켰다. 조용한 동네 분위기가 더 이상 수상하지 않았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면서 쉬었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기 전에 빨래가 종료되어 널고 창문을 다시 닫았다. 햇살이 이렇게 좋으니 외출을 하기로 했다. 나가기 직전에 혹시나 싶어 물을 틀어 봤는데, 망했다. 물은 또다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짜증난 상태로 집 밖을 나섰다. 돌아올 때 생수와 대야를 사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여기저기 검색해 보다 110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다. 정부민원안내콜센터라고 한다. ARS로 분기 처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상담원에게 연결됐다. 상담원은 성남 쪽 단수 관련 정보가 있는지 찾아 봐 주시고는, 알려진 내용은 없다면서 두 군데 번호를 알려 주었다. 하나는 성남시 수도 무슨 과의 당직실 번호였고, 다른 하나는 성남시 맑은 물 뭐시기의 대표 번호라고 했다. 동파라던가 계량기 상황을 확인해 달라고 할까 봐 나중에 집에 가서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전화해 보기로 했다. 일단 전화할 번호 하나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저녁 9시가 다 되어 플라스틱 대야를 하나 사서 돌아왔다. 물을 틀어 보니 수도꼭지가 큰기침을 하는 소리를 내다 거세게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수기도, 세면대도, 샤워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미심쩍어서 일단 2리터짜리 생수 여섯 병을 사 왔다. 마실 물이 없을지도 모르므로 하나는 냉장고에 두었다. 두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는 다시 단수의 조짐은 없다. 내일 아침에 씻고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면 된다. 물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 보다도, 대야와 여섯 개의 생수병에 안심이 된다.
지금까지 살면서 예고도 후속 안내도 없이 다짜고짜 물이 안 나온 건 처음이었다. 물이 안 나온 시간을 합쳐 봐야 몇 시간 안될 테지만, 주거로서의 최소한의 기능에 하자가 생기자 어찌할 수 없는 불신이 생긴다. 내일 부동산에 전화를 해볼 테지만 그들이라고 오늘 이 건물에 생긴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내일, 그리고 모레도 제대로 물이 나올 것인가. 고요하기만 한 이 동네가 다시금 수상하게 느껴진다. 얼른 내집 마련에 성공해서 여기서 탈출하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