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는 판교에서 전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분들을 만났다. 한 분은 내 전 사수, 다른 한 분은 마지막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 투입되어 있었던 개발자 차장님이다. 프로젝트가 종료되면서 차장님이 먼저 떠나고, 내 사수는 내가 퇴사하기 1년 전에 먼저 이직을 하면서 헤어졌다. 하지만 그때도 설마 이렇게 세 사람이 따로 술자리를 갖게 되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럼에도 만날 날짜를 잡자는 말에 덥석 날을 잡았다. 그만큼 반가웠다.
차장님은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2년 차 정도 되는 스타트업의 사장님이다. 올해 투자를 받았다고 했다. 내 대학 동기 중에도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어떤 일을 하느라 그렇게 동분서주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투자자가 올해 목표를 정해주었다고 한다. 사장님 어머님이 아는 회사에 납품하는 걸로. 하지만 영업의 어려움을 말하는 사장님의 얼굴은 딱히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좋아, 해보지 뭐, 하는 배짱이 느껴졌다. 바쁘다 말하는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 사람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내 전 사수는 회사에서 몇 가지 서비스를 맡고 있다고 했다. 같이 했던 업무에서 조금 다른 방향의 기술 영역이었다. 원래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고, 실무든 관리든 일을 워낙 잘하시는지라 지금 회사에서도 잘 안착해 있는 것 같았다. 내 전 사수와 사장님은 지금 하고 있는 기술 영역이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 기술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터라 두 분이서하시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기술적인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어 흥미로웠다. 자리가 파할 즈음 전 사수는 개인적으로 공부한 걸 정리한 자료도 공유해 주셨다. 자료 만드는 것도 워낙 좋아하고, 잘 만들었다 싶은 건 소소하게 자랑하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은 정말 2009년에 처음 봤을 때부터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유쾌했다.
물론 나도 그렇고 두 분 모두 제각각 고충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반가운 마음으로 얼굴 보며 정말 심각한 고민을 나누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대화의 맥을 이어갈 정도 수준의 소소한 괴로움, 농담 레벨로 나눌 수 있는 희화화된 고충 정도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사실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같이 프로젝트를 하고 있던 2016년에는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그때는 정말 깊은 절망을 나누었다. 그랬던 우리가 어느 정도 투덜거려가며, 한편으로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날이 온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저녁 약속에서 헤어져 집에 가는 길은 대체로 피곤하다. 물론 오늘도 몸은 꽤 피곤하게 느껴졌지만, 마음은 어쩐지 충전된 기분이 들었다. 일에 대한 몰입감을 누군가와 대화를 통해 느끼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주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이 충족감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고민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매화나무에서 풍기는 향이 갑자기 내 후각 세포를 마구 건드렸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농익은 향이다. 그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났다. 아, 이게 자극이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