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

by 달을읊다

예전의 유머 게시글에서 본 영웅과 악당의 특징이라는 글이 있다. 아래와 같은 특징이 언급되는데, 일반적인 악당과 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과는 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영웅과 악당의 특징.jpg 출처 : 오늘의 유머(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339315)

하지만 만화에서 보았던 전형적인 악당과 영웅들의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재치 있는 분석이다.


일반적인 영웅들에게는 위의 특징에서 첫 번째로 꼽았던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가 없다. 대부분 정의를 위해 싸운다.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용서하지 않았던 세일러문이나, 주님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달라고 했던 - 이 무슨 형용 모순인지 - 천사 소녀 네티나 모두 정의 하나만을 위해 산다. 그들도 연애를 하고 심지어 아이도 낳기도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사랑은 정의라는 꽃을 감싸는 예쁜 리본 정도로 그려진다. 악당은 끝없이 나타나고, 더 이상 히어로가 필요치 않을 만큼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목마르게 살 팔자다. 가엾은지고.


그래서인가 영웅의 고뇌를 그리거나 영웅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는 내용도 근래에는 종종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원펀맨>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 삼기도 한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는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노래다. 노래 가사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죽어가며 아들에게 너는 그런 일(지구를 지키는)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는 내용이다. 심지어 엄마가 일찍 죽은 것도 다 아버지가 히어로였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참 골 때리는 가사다. '눈뜨고 코베인'의 노래답게 블랙 유머가 담뿍 묻어 있다.


하지만 정말 <원펀맨>의 세계와 같이 직업인으로서의 히어로가 있다고 하면 정의 하나만을 목표로 삼아 활동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정의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개념이다. '트롤리 사고 실험'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철로 위에 다섯 사람의 인부가 있다. 기차가 달려오고, 이 상태대로라면 그 다섯 사람은 기차에 치여 죽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 옆에는 아주 뚱뚱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철로로 밀어 버리면 그 뚱뚱한 사람은 죽지만 열차를 멈춰 다른 다섯 사람은 살릴 수 있다. 이때 다섯 사람이 죽도록 두는 것이 정의로운가? 아니면 뚱뚱한 사람을 철로로 밀어 다섯 사람을 살리는 게 정의로운가? 이 질문에 아무도 선뜻 어떤 것이 정의롭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의가 이다지도 모호한 개념이다 보니 자신이 선택한 정의를 추구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회적 합의에 이른 정의라면 사적인 정의보다는 더 정의로울 것이니, 사회의 정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좀 더 영웅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라는 거대한 사회적 정의에 따라 일어났던 숱한 참사들을 돌이켜 보면 내가 속한 집단에 한정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범지구적인, 그리고 모든 시간대에 두루 정의라고 이를법한, 그런 절대적 정의는 있을 수 있을까? 아직 소견머리가 좁은 나로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영웅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팬이 되겠다. 여차하면 '로빈'처럼 그의 정의를 따르고 행동하는 주니어 히어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세계에서는 그런 정의도 없고, 그런 정의를 추구하는 영웅도 없다. 지구를 지키는 일을 가업으로 물려줄 생각이 없는 히어로가 죽어가는 세상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히어로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는 정말 신나는 노래다. 꼭 한번 들어 보시길.



* 눈뜨고 코베인 -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 EBS 스페이스 공감

* 트롤리 사고 실험 - 나무 위키, 트롤리 딜레마

- 본문 글에 언급된 내용은 '사례 2'에 해당한다. 동일한 상황에서 나의 개입 정도에 따라 '사례 1'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니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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