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한낮의 햇살

by 달을읊다

Q에게는 상자가 하나 있다. 언젠가 <화양연화>를 보고 마련했다. Q는 적당한 상자를 찾기 위해 다이소와 이케아, 각종 마트, 그리고 인터넷 쇼핑몰을 오랜 시간 들락였다. 상자 안에는 비밀을 담을 생각이었다, 양조위처럼.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여야 하니까 상자가 너무 크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의 크기가 그렇게까지 작지는 않을 테니 그래도 두 손바닥 위에 얹어 놓을 크기를 바랬다. 그리고 딱 맞는 상자를 의외의 곳에서 발견했다. 게임샵이었다. 슈퍼마리오에서 나오는 물음표가 그려진, 한 변의 길이가 20cm 정도 되어 보이는 정육면체 상자를 발견하고는 머릿속에 불이 켜진 것처럼 기뻤다. 그 날 이후 그 상자는 늘 Q의 방 책상 위 모니터 옆에 놓여 있게 되었다.


Q의 상자 안에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거기에는 Q의 비밀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맨 인 블랙>처럼 그 안에 외계인이 산다면, 숱하게 쏟아지는 비밀의 비로 커다란 저수지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Q는 그 안에 사는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그를 숭배하는 외계인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면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아마 기우제를 지낼 필요는 없을 거야, 털어놓을 비밀이 없는 날 상자 위에 손을 얹고 Q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처음 그의 방에 놀러 온다고 했을 때 Q는 상자를 어딘가에 숨겨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물론 미래의 아내는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물음표가 그려진 플라스틱 박스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Q에게 상자의 용도가 무엇인지, 열어봐도 되는 건지를 물었다. Q는 그 안에 외계인이 살고 있으며 저수지가 마르면 안 되기 때문에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래의 아내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더니 상자를 들어 귀에 가까이 대보았다.


"외계인들이 놀랄지도 모르니 흔들면 안 돼."

"이 상자를 열면 외계인들이 도망가는 거야? 저수지가 마르면 어떻게 되는데?"

"저수지 안에는 외계인이 먹을 수 있는 특수한 물고기가 살아. 물고기들이 없으면 외계인들은 모두 굶어 죽게 되지."

"그러면 외계인들의 목적은 뭔데? 영화처럼 지구를 정복하는 거야?"

"글쎄, 어쩌면 열심히 기술을 발전시켜서 그들의 행성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혹시 외계인들이 우주선을 만들었는지 봤어?"

"아니, 나도 가끔 저수지의 물만 채워주려 잠깐 열고는 금방 닫아 버려서."

"우주선을 만들었는데도 자기가 뚜껑을 안 열어줘서 고향으로 못 돌아가고 있는 거면 어떻게 해? 나중에 상자를 뚫고 자기의 목숨을 노릴지도 몰라."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그래도 나는 굶어 죽지 않게 해주는 은인이잖아."

"에이,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듣고 보니 그러네."


Q는 잠시 성난 외계인들을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특별히 암살 위협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녀의 말대로라면 Q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외계인들이 전부 떠나면 어쩌지?... 쓸쓸해서."


미래의 아내는 Q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분명 일부는 여기 정착할 거야. 자기가 지금까지 잘해줬으니까."


Q와 그녀는 상자를 열어주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베란다로 나섰다. 그 한 켠에는 먼지 쌓인 에어컨 실외기가 있어 의자 세 개를 간신히 놓을 만큼 좁았다. 5월, 주말 낮의 햇살이 그 위로 수직 하강하고 있었다. Q와 미래의 아내는 가운데 의자에 먼저 상자를 두고 앉았다.


"자, 그럼 연다."

"저기 그거, 내가 열어보면 안 돼?"

"음... 자기가 열어주는 게 낫겠다."


Q는 상자를 미래의 아내에게 건넸다. 그녀는 조심히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된 미끈한 속내가 비쳤다. 그녀는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려는 듯 한참을 신중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Q에게 미소를 짓고는 상자를 가운데 의자에 다시 내려놓았다. 뚜껑은 그녀의 무릎에 남겨둔 채였다. Q도 한동안 그 상자 속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햇살이 상자 안을 가득 채워 눈이 부셨다. 상자 안에는 여러 개의 하얀 우주선이 보였다. 그리고 햇살에 놀라 일제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외계인들이 있었다. 저수지가 마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Q의 머릿속에 비밀이 하나 떠올랐다. Q는 미래의 아내를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했다.


"저기, 나 자기한테 이야기할 비밀이 하나 있는데."

"뭔데?"

"좀 더 가까이 와봐."


그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Q의 입에 가까이 기울였다. 귓불이 거의 없는 동그란 귀였다. Q는 그녀의 귀에 비밀을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이내 동그래지고, 잠시 후에는 눈물이 맺혔다. Q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미래의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Q의 목을 끌어안았다. Q는 태양이 자신을 안아 주는 듯 눈이 부셨다. 그때 그녀의 등 뒤편으로 외계인들의 우주선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얗고 동그란 그것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보였다. 외계인들이 입을 모아 그들의 언어로 축하해요, 하고 외쳤다. Q도 그녀의 등을 끌어안은 손을 하나 펴서 흔들었다. 이제 여행을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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