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듣다

by 달을읊다

김영하 작가의 신간 <여행의 이유>를 예약 구매했다. 예약 구매자에게 선착순으로 낭독회 티켓을 보내 주었는데, 그 낭독회가 바로 오늘이었다. 퇴근을 조금 일찍 하고 코엑스로 향했다. 점심으로 먹은 고구마가 오늘따라 유독 작은 거라 평소보다 한층 배가 고팠다. 7시 반부터 낭독회가 시작되는데, 50분 전에 도착했다. 좌석표와 보내준 티켓을 교환하고 지하 메가박스에 있는 버거킹에 갔다.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내내 속이 쓰렸다. 쓰린 속은 지금 맥주 한 잔으로 달래고 있다.


코엑스의 오디토리움에는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자리에 앉으니 한동안 문학 동네 출판사에서 제작한 유튜브 영상의 예고편(?) 같은 걸 반복해서 틀어 주었다. 넓은 연단 한가운데에는 테이블 하나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한쪽 측면에는 뒤에 하얀 판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도 의자가 있었다. 증명사진 찍으러 사진관을 갔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수화 통역자분을 위한 자리였다.


정시에 낭독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는 오은 시인이 맡았다. 시인이라고 하면 유머나 빼어난 진행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의외로 아주 재치 발랄하신 분이었다. 시작하면서 낭독회답게 먼저 김영하 작가의 신간 <여행의 이유>에서 마지막 챕터를 읽어 주었다. 15분 정도라고 했다.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의 오프라인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가능한 귀로 듣는 것을 즐기라며 객석을 어둡게 했다. 이미 읽었던 대목들이 작가의 입을 통해 발음되는 것은 꽤 신선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다소 건조한 작가님의 억양에 비 오는 날 특유의 나른함이 겹쳐 조금씩 정신을 놓기도 했다.


낭독이 끝난 후에는 책의 내용이나 여행을 주제로 대담이 이어졌고, 이후 따로 포스트잇으로 받은 질문 중 아홉 개를 선택하여 답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김영하 작가와 오은 시인의 대담은 농담을 거듭하며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었다. 실패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알쓸신잡과 관련된 질문과 답도 들었다. 두 분의 수화 통역사 분들이 번갈아 나타나 바쁘게 손을 놀렸다. 생각보다 통역사 분들은 표정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말로 듣는 대화도, 손으로 듣는 대화도 즐거웠다. 그리고 역시 작가답게 마지막으로는 여행을 곱씹어 더 풍부하게 체험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기'를 권했다.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면 '여행이란 몸으로 읽는 텍스트'라는 표현이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곰곰이 곱씹어 봐도 그 표현보다 적합한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텍스트 안으로 깊숙히 빠졌다가 현실 세계로 돌아오듯, 여행은 몸 그자체를 깊숙히 그 곳에 두고 돌아와야 한다. 어떤 여행이 - 혹은 텍스트가 - 한 사람의 인생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다음 주에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을 열심히 읽다 오고 싶어 졌다. 다녀와서는 작가님이 권한대로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필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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