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혼자 떠나는 여행

by 달을읊다

내가 마지막으로 혼자 떠났던 여행은 언제였을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2013년의 체코였을까. 늘 목말랐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항공 마일리지를 털어 혼자 제주도로 왔다. 그러고 보면 제주도는 몇 번이나 왔는데 혼자 오는 건 처음이다. 2박 3일 일정이다. 회사 업무 백업이 없어 노트북까지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덕분에 글도 수월하게 쓸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 다운로드 한 영상도 있고, 그전부터 보려고 했던 영화도 하나 넣어 왔다. 이 정도면 볼거리는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오후 1시 50분 비행기였다. 지금 앉아 있는 이 곳은 서귀포니까 하루 종일 대부분의 시간을 이동한 셈이다. 분당에서 김포공항으로, 김포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서귀포로, 각각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비행기 안에서 오가며 보려고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들고 왔는데, 대합실에서 보기 시작해서 이륙한 지 30분도 안되어 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을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대비해 새책 한 권 사들고 가야겠나 고민 중이다.


드물게 아무 계획 없이 내려왔다. 올레시장 근처의 깔끔하고 저렴한 호텔을 예약했고, 그게 끝이었다. 작년 11월 올레길 걷기 행사 때 이 부근을 걸었다. 그때 눈여겨보았지만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곳을 가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대부분의 시설이 월요일에는 휴무라는 점. 그렇다면 작년에 못 걸었던 올레 코스를 조금이라도 걸을까 했는데 내일부터 내가 떠날 때까지 비가 온다고 한다. 그것 참, 이렇게까지 안 해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다 올 수 있는데.


적어도 여기까지 왔으니 바다는 봐야지 싶어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남쪽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이중섭 미술관을 들렀지만 아슬하게 개관시간을 비껴가 있었다. 그래도 정원처럼 꾸며 놓은 공간이 좋아서 푸근했다. 바다 방향으로 걷다 보니 천지연 폭포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조금 배도 고파오고 바다도 살짝 보인다. 이 부근에는 전에 왔을 때 봐 둔 맥주집이 있다. 별로 망설이지 않고 일단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한다. 바다 전망의 어느 모텔 테라스에서 두 남녀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샤워 가운을 입고 다리를 꼰 채로. 눈이 마주칠까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올 듯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소금기 머금은 바람도 마주 불어 머리카락이 조금 눅진한 느낌이었다.


맥주집에 도착했다. 먼저 온 외국인 여자분들이 따로따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카운터 앞에는 맥주 소개가 쓰인 큰 패널이 있었다. 제주 맥주와 맥파이 맥주를 취급하는 가게로만 생각했는데, 자체 생산 맥주도 있는 것 같았다. 두 가지를 시음해 보았다. 피곤한 몸이 단 걸 원하는 듯하여 천혜향 과즙을 섞은 라거를 택했다. 여행 중이시냐는 질문에 아, 네, 뭐, 하고 우물 우물 대답했다. 아직 여행 온 것 같지 않은 느낌인가보다. 기본 안주로 참깨 스틱을 2개 주었다.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은 너무 달았다. 그래도 샘플러 4종을 포장해서 나왔다. 올레 시장에 들러 마늘 통닭을 반 마리 사왔다.


닭다리를 뜯으며 영화 <패터슨>을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조용한 느낌이다. 때문에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의 시적인 삶을 엿보며 날개뼈에 붙은 살을 발라 먹고 있는 것은 어쩐지 불경한 일 같았다. 그래도 꿋꿋이 맥주를 마시고, 때로 치킨 무를 아삭여 가며 식사를 한다. 다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불러 한동안 멍하니 영화만 보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강아지도 귀엽고, 영화 전반적으로 무척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귀엽다는 거지, 깨알 발랄한 영화는 아니니 취향에 맞는 사람들만 보길 권한다.


영화를 다 보고 다시 남은 맥주를 마시며 내일은 뭘 할지 생각한다. 글 쓰다 보니 깨달은 거지만, 월요일에 우리 집을 내놓은 부동산에서 연락을 주기로 했던 것도 잊고 있었다. 오늘 읽으면서 온 <살인자의 기억법>에서처럼, 미래 기억을 소실한 것 같았다. 일단 내일은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비가 오는 정도에 따라 움직여 볼 생각이다. 혼자 온 여행은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아서 홀가분하고, 또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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