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비 오는 날 제주

by 달을읊다

다행히 비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지는 않았다.

발걸음 걷는 대로 돌아다니며 비 오는 날 제주의 풍경을 눈에 오래 담아두었다.

돌아보니 이상한 꿈같다.




당신은 낯선 호텔에 있습니다.

창 밖에는 비가 오고 있고요.

당신은 지도를 보다 공원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우산을 쓰긴 했지만 비는 소리 없이 내리는 가랑비네요.

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이상한 숲길을 지나게 됩니다.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나무 너머로는 폭포 소리가 들립니다.

빼곡히 들어 찬 녹색 사이로 폭포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공원에 도착합니다.

공원에는 철골과 돌로 이루어진 이상한 집이 하나 있습니다.

공원은 양장을 빼입었지만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어린 아가씨같이 단정하고도 싱그럽습니다.

비 오는 공원에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공원길을 따라가니,

아까 소리만 들었던 그 폭포가 당신 눈 앞에 있습니다.

기암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대한 물줄기에 놀라 당신은 한참을 바라봅니다.


비가 오기 때문에 공원에는 앉을 곳이 없습니다.

당신은 공원 근처에 도서관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연못이 있고 수선화가 피어 있습니다.

물이 흐려 알아볼 수는 없지만, 제법 깊은 모양입니다.

언덕을 올라 붉은 벽돌과 검은 페인트 칠이 되어 있는 작은 도서관에 도착합니다.

몇 명의 사람이 소리 없이 책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비에 젖은 당신 신발이 내는 소리에 놀라 얼른 로비 의자에 앉습니다.

사람들은 발소리를 죽여 당신 앞을 지나갑니다.

도서관 안에는 열대 지방의 식물들이 보입니다.

당신은 그 식물들을 등지고 앉아 한동안 글을 씁니다.

털이 하얀 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도서관을 나와 폭포에 가까이 가보기로 합니다.

폭포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는 누군가 무언가를 구웠던 가마가 있습니다.

비는 잦아들 듯, 끊이지 않고 내립니다.

폭포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가 와도, 그 사람들은 즐거워 보입니다.

폭포 앞에 서서 한동안 폭포를 바라봅니다.

폭포가 내가 되어 흐르는 물길 가운데 부러진 나뭇가지가 하나 삐죽이 나와 있고,

그 위에는 작은 자라 한 마리가 올라 가만히 비를 맞고 있습니다.

당신은 폭포를 떠나 도넛을 먹습니다.


저 멀리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입니다.

당신은 그 다리를 건너 보기로 합니다.

다리를 향해 가는 길에는 소형 선박들이 다닥다닥 정박해 있습니다.

따개비가 포구 가장자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얀 다리는 바다를 가로질러 작은 섬과 이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다리를 건너며 바다 저 편을 바라봅니다.

비 안개 때문에 온통 희고 회색으로 둘러 싸여 바다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반면 다리 바로 아래에 보이는 바다의 빛깔은 투명하고 파랗습니다.


다리를 건너 당신은 작은 섬에 도착합니다.

용암이 급하게 흘러가다 바다를 만나 급하게 멈춰 선 모양이네요.

섬의 가운데에는 숲이 자라나 있습니다.

용암이 바다를 만나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걸까요.

숲 입구에서 당신은 다리를 절뚝이는 고양이를 만납니다.

한쪽 눈도, 절뚝이는 다리에도 길게 상처가 나 있습니다.

영역 다툼이라도 한 걸까요.

당신은 그렇게 상처 입은 고양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절뚝이면서도 꿋꿋이 걸어갑니다.


숲의 한 편에서는 항구가 보입니다.

거대한 선박이 색색의 컨테이너를 싣고 있습니다.

숲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납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새의 울음소리도 들려오구요.

바닥에는 아직 흙이 되지 못한 동백꽃이 붉은 꽃잎과 노란 수술을 반쯤 남겨 둔 채 점점이 떨어져 있습니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다리를 오르려고 할 때,

당신은 상처 입은 고양이가 바다 쪽으로 향해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고기라도 사냥하려는지도 모르지요.

분명 당신보다 강한 고양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리를 건너자 갑자기 비가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우산을 썼지만 바지와 외투 자락이 젖어 갑니다.

당신은 스타벅스에 가기로 합니다.

스타벅스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테라스 있는 모텔을 지나 계속 걸어갑니다.

사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 도착하면,

당신의 꿈은 이제 거기서 끝납니다.




스타벅스에서 대신해줄 사람 없는 일을 하다 보니 한동안 판교에 있는 기분이었다.

노트북을 숙소에 가져다 두고 저녁을 먹으러 가려다 먼저 서귀포 로터리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동네책방 연합 분들이 와 계셔서 시끌시끌했지만,

잠깐 들른 여행자임에도 어찌나 환대를 해주시던지 책을 두 권이나 사고 말았다.


저녁은 떡볶이를 포장해 가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길을 잘못 든 골목에서 카레 집을 발견했다.

셰프 카레라는 게 있어 그걸 주문해 보았다.

카레에는 제주도 흑돈에 코코넛 크림에 깻잎채가 올라가 있었다.

의외의 궁합이었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따뜻한 저녁밥을 먹고 있으니 이번 여행은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비가 왔지만, 덕분에 천천히 걸었던 여행.

이게 내 속도에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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