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돈을 들여 재화나 서비스를 구하고자 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지불 능력이겠다. 일단 지불할 수단이 없다면 재화나 서비스에 대한 구매는 잠시 접어 두는 게 좋다. 하지만 예산이 확보된 경우라면 합리적 소비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필요한 기능이나 심리적 영향도를 고려하여 명확하게 리스트를 작성해 본다. 그 후 어떤 것이 핵심적인 요소인지, 혹은 부차적인 것인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것인지를 구분한다. 이 것이 요구사항 정의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어렵다. 범위에 포함해야 하는 것인데 누락했다가 나중에 구매가 이미 끝나 버린 후 실수를 깨닫기도 하고, 어떤 것이 필수 사항이고 어떤 것이 부차적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지불 능력을 초과한 구매를 하거나 무작정 갑질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한편으로는 요구사항을 정의하면서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다른 구매를 과거에 한 적이 있는지, 이번 구매를 진행하고 나면 향후 다른 구매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쉬운 예가 옷이다. 옷장 안에 검은색 미니 원피스만 가득하다면 이전 구매를 살피지 못한 것이고,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샀더니 가방과 신발과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 바꿔야 한다면 미래에 일어날 구매의 영향도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
요즘 모든 구매의 기본은 가성비인 것 같다. 물론 구매에 있어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만한 가치다. 비싼데 맛이 없는 게 이상한 거고,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구매한 물건이 모두 다 양품이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그러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정의한 후 가격을 비교한다면 진짜 가성비 좋은 것을 걸러낼 수 있다. 가끔 좋은 판매자를 만나면 당신의 리스트에 허술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게다가 요구사항을 정확히 충족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잡지식도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 좋지 아니한가.
요즘 엄마의 회갑맞이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요구사항 정의서가 절실하다. 그냥 니들이 알아서 잘 준비해 달라, 하지만 이건 없으면 아쉽다는 뉘앙스의 말을 듣다 보면 아, 고객님, 하는 생각이 든다. 만 3세부터 82세까지 4대가 같이 가는 여행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