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유자차

by 달을읊다

10년 전, 그러니까 2009년에 나는 제법 위로가 필요한 상태였다. 남자 친구가 군대를 갔고, 1년 동안 힘들게 정 붙였던 구리 사이트에서의 근무를 마감하고 (첫인상이 무서웠던 여자 과장님이 파트리더인) 상암의 팀으로 강제로 이동되었다. 팀장이 퇴사를 한 데다 고객사 운영 계약 종료로 인해 그 사이트에 있던 사람들은 TO가 있는 팀으로 갈기갈기 찢겨 보내졌으니, 딱히 나만 심한 취급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근무지를 옮겼으니 자연스레 이사를 갔다. 연신내 인근이었는데, 열 평 남짓하고 ㄱ자 모양의 베란다가 있던 원룸이었다. 집을 둘러보면서 부동산 중개인이 '신혼부부가 살아도 되겠네' 하고 감탄했던 것이 기억난다. 500에 30, 10년 전에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7월 한 달간 집을 보러 다녔으니 무척 더웠던 끝에 이 정도면 됐어, 싶었다.


그전에 1년 살았던 원룸은 옛날 가정집 구조였다. 한 대문 안에 큼직한 주인집이 있고, 그 곁에 조그맣게 별채처럼 지어진 공간이었다. 큰 창이 마당 쪽으로 나 있어서 늘 주인집에 감시받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집에 누가 오면 엄청나게 흘끗거렸다.) 작은 책상 하나와 책꽂이, 왕자 행거, 그리고 밥상 정도가 살림의 전부였다. 숨을 안 쉬는 것처럼 조용히 살았던 시절이다. 그곳에서 잠시 인천 집으로 들어갔다가 연신내로 나오면서, 혼자서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 그렇게 넓어졌다는 점이 기뻤다. 세탁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집주인 물건이 있어, 오피스텔 하고 분위기는 다르지만 풀옵션이었다. 여름이면 창문과 베란다 창을 모두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북한산 전망의 조용하고, 경사가 심하고, 조그만 슈퍼마켓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다.(덕분에 눈 오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배달도 안되고 굶을 뻔했다.)


누군가에게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는 건 좋았다. 그리고 때때로 무척 쓸쓸했다. 새로 옮긴 팀의 사람들은 좋았지만 마음이 맞지는 않았다. 어떤 일을 하게 된다고는 들었는데, 그 일을 가르칠 사람이 계속 프로젝트 중이라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남자 친구에게는 2, 3일에 한번 꼴로 편지를 썼다. 그만큼 답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는 반드시 전화가 왔다. 그 시간에는 가급적 혼자 있으려 애썼다. 회사에서 상암 월드컵 경기장 역으로 걸어가는 도중이거나, 혹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거나, 어쨌거나 혼자였다. 평일 저녁에 약속을 잡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때때로 외출하기도 했다. 홍대 쪽이었다.


그때만큼 노래를 많이 들었던 때는 없는 것 같다. 사무실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잠들 때까지 노래를 들었으니까. 집에 TV는 있었지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3년을 살면서 두 번 정도 틀어 봤다. 이후에는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냉장고 위로 들어다 옮겼을 정도다. 산 아래의 아무것도 없는 동네는 고요해서, 사람과 대화할 일 없는 그 적막함은 노래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2008년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양한 인디 음악이 퍼져 나왔다. 홍대에 좋아하는 인디 밴드의 공연을 가면 보통 그 밴드만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는 이름도 못 들어본 다른 뮤지션이 같이 공연했다. 그들의 노래가 마음에 들면 CD를 산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뮤지션의 공연을 가게 되면 또다시 새 뮤지션을 알게 된다. 그런 공연을 한 달에 네 번 간 적도 있다. 지금 내 CD장을 메운 대부분의 CD가 그때 사들인 것이다. 숨 쉬듯 음악을 들었으니, 좋아하는 음악은 많을수록 좋았다.


<브로콜리 너마저>도 그렇게 만났던 뮤지션 중 하나다. 마음이 헛헛할 때면 언제나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1집 정규 앨범 하나면 충분했다. 현재 <가을방학>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계피가 녹음을 했던 앨범이다. 물론 덕원의 목소리도, 멜로디도, 가사도 참 좋지만, 그 앨범에서는 정말 계피의 보컬이 요즘 말로 하드 캐리 했다. 모든 노래가 좋았지만 위로의 갑 오브 갑은 역시 '유자차'다. 가사는 이별 후의 추억과 눈물을 켜켜이 담은 '이 차를 다 마시고 / 봄날로 가자'는 내용이다. 나도 봄날로 가고 싶었다. 때문에 어느 햇살 맑은 11월에 유자를 한 봉지 사 와서 차를 담가 보았다. 그 자취방의 바닥에는 페르시아 양탄자 같이 생긴 러그가 깔려 있어, 그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밥상을 폈다. 밥상 위에서 잘 씻은 유자 껍질을 벗겨 채를 썬다. 오렌지 알맹이 같이 생긴 유자 알알이 씨앗이 들어 있어, 일일이 칼집을 내어 빼주었다. 양이 얼마나 될지 모르니 작은 병을 여러 개 사 와서 소독하고 유자와 설탕을 번갈아 담았다. 때문에 병마다 맛은 조금씩 달랐겠지. 손은 끈적해졌지만 어느 토요일 오후는 그렇게 길게 햇볕 안에서 흘렀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이 차를 마시면서 마음이 더는 갈라지고 부르트지 않길,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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