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렬한 색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가을이다
나는 학교 다니는 기간 대부분을 꽤 우울하게 보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성적인 우울증이었다. 행복감의 척도를 0점에서 10점 사이로 둔다면 평균적인 사람들이 5점 ~ 7점 사이를 누리다 좋은 일이 생기면 10점을 찍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보다 보통 2점 정도가 낮았다. 그 시기에는 감정이 꽤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성격이 상당히 괴팍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무뚝뚝하다, 차갑다는 것이었다. 그런 감정적인 영향 때문인지 내 시야에 들어오는 색깔은 대부분 무채색이거나 색깔이 있어도 어두운 톤이었다. 어두운 자주색의 교복,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색 스타킹, 회색의 시멘트로 된 복도, 겨울 동안 희뿌옇게 말라비틀어진 잔디, 내내 그런 것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아주 선명한 붉은색의 잎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2005년 가을의 일이다. 대학생이 되었고 학교 교정에 봄이 되면 벚꽃이 피는 나무가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나무가 가을이 되자 그렇게 선명한 붉은색의 낙엽을 떨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직 미세먼지가 뭔지 모르던 시절, 가을 하늘은 사실 아주 파랗고 맑았다. 하늘이 그렇게 파랗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 파랑을 배경으로 바람이 불면 비처럼 붉은 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 잎도, 단풍나무가,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모두 그렇게 노랗고 붉었다. 햇빛이, 또한 달빛이 투명했다. 공기에는 낙엽이 조금씩 부서져가며 피우는 향내가 났다. 흔히 '가을 냄새'라고 부르는 그것.
그러고 보면, 고3 어느 가을날에도 그런 기억이 있다. 주말에 자습하러 친구들과 학교를 나왔다가 노랗게 익은 모과를 서리했던 일. 땅에서는 손을 뻗어도 잘 닿지 않자,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흔들며 털만큼 본격적이었다. 노란 모과의 껍질 위에서, 그리고 친구들의 웃음소리 위에서 말간 햇살이 하염없이 부서졌다. 어디 멀리 놀러 나간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 그 사소한 일탈 행위가 너무 즐거웠더랬다. 그날 서리한 모과는 얼마 후 모과차로 모습을 바꾸어 모두가 따뜻하게 나누어 마셨다.
사실 나도 그렇게 웃은 기억이 있다고, 눈 앞에 펼쳐진 세계의 다양한 색감을 알아챌 수 있다고, 스스로의 감정적 무능력을 타파하기 위해 늘 가을을 기다린다. 비록 오늘은 미세먼지가 부옇게 일었지만 올 가을은 참 좋았다. 많이 걸었던 탓인지, 새로운 동네에서 맞는 첫가을이기 때문인지, 좀 더 자세하게 가을이 익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은 한 주간 비가 오락가락하며 먼지는 씻어 내릴 예정이니까 주말이면 좀 더 가을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첫눈이 오기 전까지는, 아주 맑고 고운 한 줌의 햇살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사이에 가만히 비쳐 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