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 걸친 나날들
한강을 접한 최초의 기억은 명절날 귀성길에서였다. 정확히는 강변에 접한 가로등 불에 대한 기억이지만 말이다. 우리 가족은 인천에 살았고 할머니 댁은 아산에 있었는데, 귀성 때는 보통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하곤 했다. 지금처럼 주 5일 근무제도, 대체 휴무도 없으므로 차량 정체를 피하기 위해 한 새벽에 귀경길에 오르곤 했다. 티코 뒷좌석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가다 보면 아직 어두울 때 서울에 도착을 했다. 사위는 깜깜하고 차는 올림픽대로를 달린다. 거기에 강이 있다고 하는데 새까매서 잘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신 건너편 강변북로에 점점이 늘어선 오렌지색 가로등 불이 예쁘다. 그때는 졸음도 저 편으로 날아가 버린다. 우주 가운데를 떠도는 혜성이 된 듯 신이 난다.
실제 물이 흐르는 실체로서 한강을 보게 된 것은 10여 년이 지난 후였다. 한강 북쪽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신도림에서 2호선을 타고 다리를 건넜다. 그때마다 어릴 때처럼 지하철 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을 집어삼킬 듯 빤히 바라보곤 했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물결에 반사된 햇살에 눈을 뜨기 어려울 때도 있었고, 아주 추운 날에는 강이 얼어 생긴 얼음이 벌집 모양으로 갈라져 물 위에 떠 다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강 위로 해가 질 때였다. 덜컹덜컹, 하고 전철은 리듬감 있게 달리고 하늘은 아득한 색으로 물들어 간다. 사실 전철 안에서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합정역에서 출발한 2호선은 이내 당산역으로 접어들면서, 아득했던 풍경이 순식간에 암전 된다. 그러면 갑자기 송두리째 노을을 뺏긴 기분이 들어 분했다. 하지만 전철 밖에서 보더라도 어차피 노을의 시간은 짧다. 그걸 알고 있어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로부터 또다시 10년 가까이 지난 후 한강에 가깝게 살 기회가 생겼다. 직장에 좀 더 가까이 살고 싶어 자취방을 성산동으로 옮긴 것이다. 신축 오피스텔이었는데, 전에 살던 데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다. 바로 앞에 새로 올라가고 있는 오피스텔이 있어 한낮에도 암막 커튼으로 빈틈없이 창을 가렸다. 하지만 그 집은 불광천에 접해 있어 한강까지 금방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회사도 모처럼 한가한 시즌이어서 시간이 있었기에, 10km 마라톤을 신청해 두고 두 달 동안 한강변에서 달리기 연습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불광천에서 한강으로 쭉 내려가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양대교 언저리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마라톤이 끝나고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겨울이 지난 후에는 산책 삼아 반대 방향인 양화대교 쪽으로 걸었다. 보통 망원 유수지로 빠져나왔고, 좀 더 기운을 냈던 날에는 양화대교로 나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합정 교보문고에 들렀다 오기도 했다.
한강 가까이 걸으며 느낄 수 있던 가장 큰 즐거움은, 이제 막 해가 떨어져 공기에 남빛이 스미기 시작한 아래로 흐르는 강을 보는 것이다. 물 냄새가 나고, 잘 보면 물고기가 다니는 것도 보인다. 멀리서 바라볼 때보다 가까이 있을 때 한강은 훨씬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른다는 자연법칙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거대하게 꿈틀대고 있다니, 감탄스럽고 한편으로는 서늘한 일이다.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면 성산대교와 조금 멀리 보이는 양화대교에도 불이 들어온다. 강물은 지금 막 켜진 다리의 불빛을 비춘다. 물결의 흐름에 따라 빛의 모양이 일그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한다. 그런 출렁임이 좋아 오랜 시간 바라보다 오곤 했다.
지난 4월에는 아쉽게도 한강변을 떠나야 했다. 판교에 있는 직장으로 이직을 하면서 이사 온 것이다. 그나마 가까이에 탄천이 있어 조금 아쉬움을 덜어 본다. 탄천은 비가 많이 오면 천변 옆 인도까지 가끔 범람하고, 한동안 가물면 바닥이 보이기도 하고 변화가 급격해 재밌다. 하지만 한강 옆길을 걷다 와서 그런지, 나름 깔끔하게 정비해 놓은 길인데도 그다지 그 곁을 걷는 재미는 없다. 가끔 서울에 나갈 일이 있으니 이제 한강 서쪽 말고 동쪽에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봐야겠다. 한강처럼 큰 강을 망연히 바라볼 기회가 있다는 건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내려진 축복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