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 속에 오랜 세월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 얘기하기 전에 말이지…”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누가 소울 가이드가 되는지, 궁금하지 않니?”
카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것도 궁금해요. 저에게 왜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도요.”
그녀는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두 가지 덕목을 지닌 영혼에게만 소울 가이드를 제안한단다.”
카론의 시선이 쏠과 넬에게로 향했다. 넬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고, 쏠은 쑥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돌렸다. 아이리스는 따뜻한 눈으로 녀석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용기, 그리고 책임감!”
그녀가 두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위기에 빠진 생명을 구하려는 용기, 그리고 슬픔과 공포에 빠진 영혼을 끝까지 이끄는 책임감. 그 두 가지를 가진 영혼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단다. ‘소울 가이드를 해 보지 않겠니?’라고….”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카론을 보며 말했다.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야.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단다.”
그녀의 말은 자신이 그 두 가지 덕목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카론을 고개를 숙였다. 벅차오르는 듯한 자부심과 함께 알 수 없는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쉼터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왜 만드신 거죠?”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오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글쎄…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잘 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그녀의 말에 쏠과 넬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치매 여인을 찾아 병원을 향해 달리던 소울 픽업 안에서 나눴던 농담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이리스는 몇백 살, 아니 몇천 살일지도 몰라.’
넬은 목을 움츠리며 킥킥거렸고, 쏠은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녀석들의 장난스런 모습에 눈을 흘기던 아이리스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왜 만들었는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단다.”
쏠과 넬은 움찔 놀라는 척했다. 녀석들은 앞에 앉은 이웃집 할머니 같은 신이 억지로 화난 척하고 있다는 걸 잘 아는 듯했다. 카론은 그런 셋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도 잠깐 말했지만… 모든 생명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생을 한단다. 부자든 가난하든, 착하든 나쁘든… 그리고, 그 삶의 끝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누구나 무섭고 슬프지. 그래서 나는 모든 생명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싶었어.”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깊은 회상에 잠긴 듯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연민이 카론의 가슴을 울렸다.
그는 문득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징검다리를 못 건너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영혼도 떠올랐다.
모든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평화로울 수 있기를 바라는 아이리스의 진심이 느껴졌다.
아이리스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그들을 위한 마지막 쉼터야. 심판은 내 일이 아니고…. 난 단지, 다독여주고 떠나보내 줄 뿐이지.”
카론은 숨을 죽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마치 잔잔한 강물처럼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죽음의 의미, 영혼을 위로하는 쉼터의 존재. 그리고 소울 가이드….
그의 눈앞에 깔려 있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두려움은 걷히지 않았다.
고민하던 카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지난번에 손전등 주시면서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악마와… 그 하수인, 루어였나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넬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루어들은 저희도 몇 번밖에 못 봤어요. 사람 입술 모양에 박쥐의 날개 달린 괴물들… 기괴하고 흉측해요.”
“으… 아직도 소름 돋아요. 피보다 붉은 입술이 박쥐처럼 날아다니던 걸 생각하면… 그런데, 아이리스! 그 루어들을 부리는 악마는 어떤 놈이에요?”
쏠이 몸서리치며 묻자, 아이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나지막이 목소리를 깔았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바알이라는 타락한 신이 있었단다. 창조주에게 반기를 들고 악마가 됐지. 사람의 몸에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괴이한 형상으로 솔로몬의 72악마 중 첫 손에 꼽힌단다.”
쏠과 넬이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아이리스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바알은 또다른 악마 릴린과의 사이에서 세 자식을 두었지. 릴린은 아담의 첫 아내 리리스의 딸이야. 바알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나눠 가졌어. 미친 황소처럼 포악한 불탈, 사악한 고양이처럼 교활한 까탈… 까탈은 딸이야. 그리고 기괴하고 끈적거리는 개구리 같은 프록탈.”
아이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딸도 있었군요….” 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낮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말이지, 음탕한 바알은 릴린 몰래 밤을 지배하는 박쥐 여왕, 바퀸과 뒤엉켰어. 둘 사이에 태어난 악마가 바탈이란다. 그 사실을 안 릴린은 바퀸을 사막으로 내쫒고, 바탈을 괴롭혔어. 형제들도 막내를 업신여기고 구박했지. 그래서 바탈은 언제나 깊은 어둠 속에서 자랐지"
쏠이 꼬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비겁하게 길목에 숨어있다가 영혼을 삼키고 달아났던 거군요.”
“그래, 맞아.”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바탈은 쉼터로 오던 영혼들을 잡아먹었어. 내가 붙잡아 스틱스 강 아래 동굴에 가뒀지. 그런데 놈은 삼켰던 영혼들을 뱉어내 부하로 만들었어. 그게 바로 루어야. 가짜 미끼라는 뜻이지. 루어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을 달콤한 거짓말로 꼬드겨 바탈에게 바치고, 사악한 영혼에게도 속삭이지. ‘넌 지옥불에 떨어질 거야. 바탈님을 불러내서 구원받아’라고….”
카론이 숨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리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루어들도, 악마들도 호시탐탐 영혼을 노려. 그러니 늘 경계해야 해.”
그녀의 말에 쏠과 넬은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떨었고, 카론도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리스는 셋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서로 믿고 의지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소울 가이드를 팀으로 꾸린 이유이기도 하지. 더구나 너희는 둘이 아니라 셋이잖아"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쏠과 넬을 바라보았다.
“이제 너희 얘기를 해 줄게.” 그녀의 눈빛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기 시작했다.
“재작년, 그러니까… 너희가 이 집에 오기 전날이었단다. 그날 한 소울 가이드가 임무를 마치고, 무지개 다리를 건너 천국으로 떠났어. 그녀는 암고양이 중 처음으로 캡틴이 된 존재였고, 너희의 할머니였지. 이름은 ‘쟌’, 잔다르크처럼 용감하다고 해서 내가 붙여준 이름이란다.”
쏠과 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들의 할머니라는 말에 녀석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쟌은 아주 특별한 소울 가이드였어. 내가 이 일을 제안했을 때 쟌은 망설였는데… 혼자 남겨진 딸, 즉 너희 엄마를 조금 더 보고 싶다며 이 일을 하게 됐지. 그러다 너희가 태어났고, 쟌은 천천히 떠날 준비를 했단다.”
아이리스는 잠시 쏠과 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쟌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기 전날… 너희가 살던 집에 불이 났어. 엄마 아빠는 너희를 구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너희만 창밖으로 밀어내고, 빠져나오지 못했어.”
쏠과 넬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고, 눈에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
불길 속에서 자신들을 지키려 몸부림쳤을 엄마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쟌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 이곳에 도착한 너희 엄마 아빠의 영혼을 보고 기절하고 말았단다. 깨어난 뒤에는 울면서 나에게 간청했어. ‘여기 남아서 저 아이들을 돌보고 싶어요. 부디 허락해 주세요’라고….”
아이리스는 고개를 떨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요청을 받아줄 수 없었어. 한 번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로 한 영혼은 뒤로 물러날 수 없거든. 대신 내가 쟌에게 약속했지. ‘내가 너희들을 이곳에 데려와 키워 주겠다’고… 그제서야 쟌은 고개를 끄덕이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단다.”
카페 안에는 숨 막힐 듯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쏠과 넬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긴 침묵을 깨고 아이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너희는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꼬물이들이었어. 눈도 뜨지 못했지. 나는 너희를 이 쉼터로 데려와 함께 지냈던 거야. 그러다가 너희들이 소울 가이드를 해 보고 싶다고 해서 게이트 하우스로 내려보냈지. 소울 가이드 콤비는 모두 영혼들이지만, 너희는 살아있는 고양이라서 이곳에 머물기가 불편할 것 같았거든.”
카론은 말없이 쏠과 넬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의 슬픈 가족사와, 아이리스의 따뜻한 사랑이 고스란히 와 닿으면서 그의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차올랐고, 이 기묘한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리스…”
넬이 코를 훌쩍였고, 쏠도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꼈다.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꼭 안아줬다.
“괜찮아…. 너희는 아주 잘 자라줬어. 그리고 지금은 누구보다 훌륭한 소울 가이드잖니?”
쏠과 넬의 조그만 입에서 왈칵 울음이 터졌고, 카론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녀석들은 아이리스의 품에 안겨 한참을 흐느끼다 울음을 그쳤다.
그녀가 둘을 품에서 떼어내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카페 안은 고요하고 포근한 온기로 가득했다.
그때, 넬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쏠을 힐끗 바라봤다.
“야, 쏠!”
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너, 앞으로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
“뭐, 뭐라고?”
쏠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고, 넬의 엉뚱한 도발은 슬픔에 젖어 있던 분위기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넬이 아이리스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이리스, 내가 얘보다 먼저 태어났죠? 제가 누나 맞죠?”
그제서야 넬의 말뜻을 알아차린 쏠이 펄쩍 뛰면서 외쳤다.
“아니죠? 아이리스, 제가 오빠죠?”
그녀는 어이없어하며 팔을 뻗어 두 녀석의 이마를 ‘콩~콩!’ 쥐어박았다.
“아이구 시끄러워! 나도 몰라! 알아도 절대 말 안 해 줄 거야!”
그녀의 말에 카페는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카론도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쓰윽 닦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녀석들 참! 울다가 웃다가 바쁘다 정말….”
그러자 넬이 혀를 낼름 내밀며 말했다.
“미스터 카론! 그게 우리 매력인 걸요….”
넬의 귀여운 허세에 카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카페 문을 나선 셋은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쏠과 넬은 걷는 내내 투닥거렸다.
“어쨌든 누나라고 불러. 내가 먼저 태어났다고!”
“누가 그래? 증거 대봐!”
게이트하우스에 도착하자, 넬은 쏜살같이 LP 플레이어로 돌진했다.
“오늘은 내 차례야! 내가 고를 거야!”
“그래 그래. 오늘은 이 오빠가 양보하지!”
카론은 녀석들의 끝없는 아웅다웅에 고개를 흔들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넬이 LP판에 조심스레 바늘을 얹자,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니콜라 콘테의 『보사 페르 두에(Bossa Per Due)』였다.
리듬감 있는 베이스와 산뜻한 멜로디가 도시의 밤처럼 세련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거실을 가득 채웠다.
“오! 이거 신나는걸!”
“와우! 춤춰야겠는걸?”
녀석들은 음악에 맞춰 소파 위에서 앞발을 들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쏠은 꼬리로 넬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춤을 췄고, 넬은 까르르 웃으며 쏠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카론은 녀석들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게이트하우스엔 오늘도 평화가 깃들었다.
평소보다 아주 많이 시끄러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