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총구 앞의 소녀

<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끼엠마을>

by 부지깽이

박규는 촌장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정자 옆을 돌아 마을 안쪽, 뚜엣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을 중심에서 안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그 길 끝에 있는 대나무와 진흙으로 엮은 집.

이곳이, 이제 규에게 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잠시 뒤 나무문이 삐걱 열렸다.

그곳에—뚜엣이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햇살처럼 반짝였고, 그녀의 옷자락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가볍게 떨렸다.

“왔어요···?”

그녀의 한마디 속엔 기대와 수줍음, 그리고 설레는 떨림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규의 가슴에도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뚜엣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규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엔 햇살처럼 번지는 반가움과, 말하지 못한 기다림이 어른거렸다.


‘뚜엣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는 눈길을 떨구며, 가슴 한쪽이 저며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가 좀 늦었지···?”

뚜엣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오빠를 기다리는 건 괜찮아요. 늘 설레니까요.”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만성 천식과 폐결핵을 앓고 있는, 뚜엣의 어머니 응우옌 티 흐엉 여사였다.

규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약초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그녀는 천을 입에 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군인···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규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깊이 머리 숙였다.

그녀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뚜엣이 살짝 규의 손을 끌어당겼다.

“오빠, 그네··· 아직 그대로 있어요. 우리, 거기 가요.”

그들은 마당을 돌아 집 뒤편으로 향했다.

작은 숲과 공터 사이—규가 예전에 만들어 준 그네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뚜엣이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규도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말보다 깊고, 선명한 침묵이 흘렀다.

뚜엣이 먼저, 아주 조심스레 다가와 규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규는 그 손을 천천히 감싸 쥐고,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뚜엣은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규는 그녀의 이마에 아주 작고 조용한 입맞춤을 남겼다.

떨리는 숨결, 스치는 감촉,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마음이 부서질 듯 고요한 침묵.


잠시 머뭇거리던 규가 속삭였다.

“마을 어귀에서 촌장님을 뵈었어.”

뚜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님은··· 말씀은 없지만, 늘 다 알고 계신 분이에요.”

“응.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

뚜엣은 그네에 살짝 앉았다. 그네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규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오늘, 조금 다르게 보여요.”

규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보다 눈빛이 먼저 젖어 들었다.

뚜엣이 나직하게 물었다.

“오빠,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나요?”


* * *


3개월 전.

규는 분대원들과 끼엠 마을 뒤 밀림을 수색하다 발을 잘못 디뎌 방향을 잃었다.

순간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분대원들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고, 규는 밀림 한가운데 혼자 남겨졌다.

당황한 규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김 병장! 김 병장!··· 함 상병!!”

절박한 외침. 멀리서 희미한 응답이 돌아왔다.

“여기야! 이쪽이야, 이쪽!”


그러나 그 소리는―곧이어 밀림을 뒤흔든 총성과 함께 휩쓸려갔다.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 짧은 비명, 그리고—사라진 대답.

분대는 후퇴했다. 그를 남긴 채···.

저 멀리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적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규는 재빨리 숲 속을 향해 뛰었다.

숲은 미로였다. 한 번 방향을 틀 때마다, 눈앞에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그때였다. 잎새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움직임 하나.

규는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긴장으로 굳은 손끝이 방아쇠에 닿았다.

그러나 총구 끝에 선 건, 적이 아닌 나물 바구니를 든 처녀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멈춰 섰고, 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치 시간까지 멈춘 것처럼 숨조차 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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