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끼엠마을>
뚜엣. 그녀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캐러 나온 길이었다.
규의 총구는 그녀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 차가운 쇳덩이가 아니라 그 총 너머, 그의 눈동자에 먼저 닿았다.
그 순간—그녀는 규의 등 뒤로 스며드는 베트콩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댄 그녀가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쉿!”
언어를 초월한 그 손짓 하나가 규의 심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터질 듯한 숨결 사이로, 그는 마침내 총을 내렸다.
그리고—그녀가 조심스레 옮기는 발걸음을, 규는 그대로 따라갔다.
그녀가 멈추면 멈추고, 몸을 낮추면 따라 웅크렸다.
그녀는 숲 가장자리, 칡덩굴에 가려진 작은 동굴로 그를 이끌었다.
숲에서 멧돼지나 폭우를 만났을 때 몸을 피하기 위해 기억해 둔 은신처였다.
동굴 안은 어두웠고, 좁았다.
나란히 앉은 둘의 어깨가 맞닿았고, 숨결이 조심스레 섞였다.
숨죽인 공기 속, 그들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 낯선 말소리.
마른 나뭇잎이 구르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을 찾는 듯했다.
동굴 안 작은 어둠 속엔 둘의 목숨과 떨림과 온기가 함께 갇혀 있었다.
다행히—발소리는 이내 멀어졌다.
그제서야 규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햇살 속으로 걸어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사실··· 저도 무서웠어요.”
그녀는 규를 데리고 조용히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입구에서 둘은 몇 마디 말만 나눴다.
“고맙습니다.”
“잘 가세요.”
그러나, 그 짧은 인사는 부대로 복귀하는 규의 발걸음을 자꾸 붙잡았다.
규는 문득 뒤를 돌아보다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그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이름이··· 뭐예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살며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뚜엣이에요. 팜 뚜이 뚜엣.”
그 순간, 규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하지만 왠지 낯설고, 쑥스러워서 그는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뒤로 돌아 달렸다.
도망치듯 달리던 규가 갑자기 멈춰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뚜엣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다음에 또 만나요. 꼭··· 뚜엣!”
* * *
햇살은 그네 옆으로 부드럽게 쏟아졌고, 흔들리던 나뭇잎이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떨어졌다.
규는 눈을 감았다. 그림처럼 떠오르는 그 순간.
어두운 동굴 안, 숨죽이던 떨림, 달려가서 묻던 이름.
'뚜엣.'
그 이름을 듣고 도망치듯 달렸던 바보 같은 자신.
“오빠, 그날 기억나요?”
뚜엣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난 날요.”
“응. 기억나. 너무 또렷해서··· 지금 이 순간도 그 날이 계속되는 것 같아.”
뚜엣은 웃었다. 그러다 볼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오빠가 내 이름 물어보려고 막 뛰어왔을 때··· 정말 설렜어요. 사실은··· 오빠가 그냥 갈까 봐—마음 한 켠이 허전해지려고 했었거든요.”
그 말에 규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스며든 그림자를 뚜엣은 금세 알아챘다.
“오빠! 부대에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순간, 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냐. 아무 일도···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뚜엣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무렵, 뚜엣이 규가 가져온 통조림을 작은 화로에 데웠다.
기름이 살짝 끓어오를 때, 방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규는 방으로 들어가 의무실에서 얻어온 천식약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흐엉 여사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눈빛엔 딸을 지켜줄 사람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식사는 따뜻했고, 대화는 조용했고, 시간은 쏜살처럼 흘렀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마을 입구 갈림길 위에 마주 선 둘의 그림자가 살짝 겹쳤다.
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있어. 다음주에 봐.”
돌아서려던 규의 뒷모습을 향해, 이번엔 뚜엣이 용기를 냈다.
“오빠···”
규가 돌아보며 말했다.
“응?”
뚜엣은 망설였다.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나, 할 말이···”
“응, 뭔데?”
뚜엣은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들었다.
“오빠! 나, 두 달 동안··· 꽃이 피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