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베트남 닌호아 끼엠마을>
박규는 기상나팔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어제 오후 전투같던 축구가 끝나고, 전두칠의 머리 위로 솟구친 무지개의 잔상은 밤새 가슴 속에서 이글거렸다.
그리고, 무지개를 지키겠다고 짖던 개의 얼굴, 그 광기를 규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에 꾹꾹 눌러 새겼다.
오늘은 비번.
과거로 떨어진 규가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잔혹한 운명’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자의 기다림이었다.
53년 전 바로 오늘, 그리고 지금—
규는 그날로 다시 돌아와,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 팜 뚜이 뚜엣.
이름처럼 맑고 순수한, 베트남에서 보기 드문 눈(雪)을 닮은 여자.
잔인한 달빛 아래 눈처럼 녹아 없어질 운명을 지닌―규의 목숨을 구하고도 끝내 자신은 구하지 못했던, 열여덟 봄을 품은 처녀.
53년 전 그날과 다른 건─그녀가 6개월 후 죽는다는 걸 규가 알고 있다는 것.
규는 구식 M1 소총을 메고, 허리띠에 작은 물통을 찬 채 끼엠 마을로 향했다.
닌호아의 햇살은 잔인하리만치 따뜻하고 눈부셨다.
끼엠 마을로 가는 길.
진창과 흙먼지가 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흙길은 어제 내린 비에 눅눅하게 부풀어 있었고,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이 어제도 거기 있었는지, 53년 전에도 거기 있었는지 규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같았지만, 아무것도 같지 않았다.
규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햇살이 내려앉은 땅, 그 위에—뚜엣이 있었다.
살아 있었고, 웃고 있었고, 그리고 몇 달 후 그 자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질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이 머무를 땅을 규는 다시 밟고 있다.
그 모든 걸 아는 그의 발이 무겁게 그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언젠가 피로 물들, 예고된 침묵처럼 느껴졌다.
규는 마을 입구, 햇볕에 바래 글자가 희미해진 팻말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뚜엣의 집은 마을 가장 안쪽. 길을 따라 걷는 동안에도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발걸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마을 한가운데 큰 나무. 그 그늘 아래 작은 정자에 검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얇은 회색 수염이 바람결에 스산하게 흔들렸다.
끼엠 마을 촌장, 레 반 훙이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방행정청 서기관으로 근무하다 인도차이나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와 촌장으로 추대됐다고 했다.
한자와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한국말도 수준급이다.
그는 규를 보자 눈을 가늘게 떴다가, 잠시 뜸을 들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 병장, 얼굴이 더 말랐구먼.”
규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산책하십니까?”
“고요할수록··· 걱정이 더 앞서는 법이지요.”
촌장의 말에 규는 입을 열려다, 그대로 다물었다.
말할 수 없었다. 여섯 달 뒤, 이 마을이 피로 물들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피의 시작이, 눈앞에 있는 노인의 죽음이라는 것을.
대신 그는 조용히 촌장의 지팡이 끝이 스치던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아이들이 숨을 곳이 있습니까?”
촌장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고요한 눈동자는 규에게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고 있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장소 말입니다. 군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촌장은 눈을 감았다.
“지금도 가끔 꿈을 꿉니다. 논으로 날아온 포탄 소리, 그리고··· 우리 아이가 부서지던 날.”
한 줄기 정적이 흘렀다. 규는 숨을 고르며 말끝을 이어갔다.
“이번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비해 주세요, 촌장님.”
촌장의 손이 지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 우리가 먼저 움직이라는 말이구먼.”
규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말로 부정하지도 않았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촌장님은 절대 앞에 나서지 마십시오. 아이들과 여자들을 먼저 숨겨 주세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까?”
“··· 그때는, 싸울 수조차 없을 겁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라는 것을 알면서도—혹시나, 정말 혹시나 무지개의 여신이 감동해 그의 기도를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믿음 하나로 그는 지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