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리차드 한과의 첫 만남

<1972년 4월 · 닌호아 하이난거리>

by 부지깽이

찻집에서 나온 규와 뚜엣이 립스틱클럽 쪽으로 서둘러 가던 그때, 불안한 소란이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좁은 골목.

미군 다섯 명과 한국군 병사들이 맞서서 험악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욕설이 오갔고, 어깨가 부딪혔고··· 팽팽한 긴장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Fuck you! Goddamn stupid!”

(젠장! 이 멍청한 자식들!)

“양키 고홈!”

“박 병장님, 저 코쟁이가 우리에게 욕하는 것 아닙니까?”


규가 한국군 병사들에게 다가갔을 때 옆 분대 소속 낯익은 일병 한 명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몇 번 함께 작전에 나갔을 때 규가 가방끈이 길다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났다 보다.

규는 잠시 사태를 관찰하다가 조용히 두 무리 가운데 나섰다.


“잠깐만! 내가 얘기해 볼게.”

그는 미군 병사들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Hey! Easy! What's the problem here?”

(진정들 해요! 여기 무슨 일입니까?)

미군 중 한 명이 한껏 날이 선 채로 외쳤다.

“We just asked if we could pass. Then they yelled at us!”

(우린 그냥 지나가도 되는지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소리부터 지르더라고요!)

다른 미군도 소리쳤다.

“We didn’t touch anyone! Just words!”

(우린 아무도 안 건드렸어요! 그냥 말만 했다고요!)


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군 쪽으로 돌아섰다.

“지나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말투가 좀 세게 들렸던 것 같아. 우리 쪽에서 먼저 날 세웠나 봐.”

그 말에 병사 한 명이 씩씩댔다.

“병장님, 지들이 와서 건방지게 뭘 지껄이니까 그렇죠! 우리가 먼저 민 것도 아니고!”


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미군 쪽으로 돌아섰다.

“Look, these guys say they felt disrespected. But maybe it was a misunderstanding.”

(한국 병사들이 기분 나쁘게 느꼈다고 하네요. 근데 아마도 오해였던 것 같습니다.)

“Maybe··· yeah. We didn’t mean to offend.”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Good. Then shake hands. No fight here, okay?”

(좋습니다. 그럼 악수들 하죠. 더 싸우지 말고, 알겠죠?)


양측은 머뭇거리다가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미군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한국군 병장이 어색하게 그 손을 잡았다.

“오해였네요. 앞으로 조심합시다.”

“Let’s stay cool.”

(좋게 갑시다.)


악수가 끝나고 서로 흩어지는 가운데, 한 미군 병사가 규에게 다가왔다.

제복 어깨에 ‘Intel’ 마크가 반짝였다.

“Hey. You speak English pretty well.”

(이봐요. 영어 꽤 잘하네요.)

“Thanks. I try. Translator”

(감사합니다. 노력 중입니다.)

“Nice. My Name’s Richard Han. Intel sergeant, U.S. Army.”

(좋아요. 리차드 한입니다. 미 육군 정보병과 하사예요.)

“Park Gyu. Sergeant, ROK Army.”

(박규입니다. 한국군 병장이에요.)

“Impressive handling back there. We should talk more sometime.”

(방금 처리한 거, 인상 깊었어요. 다음에 또 얘기해요)

“Sure. I’m around.”

(좋습니다. 근처에 있을 겁니다.)

리차드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규는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때 뚜엣이 다가왔다.

“오빠··· 괜찮아요?”

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응. 다행히 싸움은 안 났어.”


그의 눈빛은 골목 너머, 방금 전에 헤어진 리차드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순간, ‘무지개’와 ‘진실’ 사이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인연 한 줄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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