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베트남 하이난거리 립스틱클럽>
한편 규와 리차드는 벽 쪽 작은 테이블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규의 영어는 리차드와 의사소통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유창했다.
“박 병장.”
규를 부르는 리차드의 눈빛은 여전히 냉정했지만, 따뜻한 신뢰와 미묘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차드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 립스틱클럽 사장이… 암시장 커넥션과 얽혀 있다는 정보가 있어요. 문제는—”
그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한국군 쪽에서 무기상과 거래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겁니다.”
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전투에 필요한 건가요? 무기는 미군에서 충분히 보급해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바로 그게 이상합니다. 탄약, 수류탄, 심지어 기관총까지도… 미군이 넘치도록 공급하는데, 왜 굳이 민간 무기상한테 손을 내미는 걸까요? 단순한 개인 이득인지, 조직적인 조작인지…?”
규는 문득 어떤 일이 떠올라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혹시, 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아직은 뭐라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 병장… 나는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 같아요.”
리차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게다가 영어도 잘 하구요.”
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리차드가 물었다.
“저 혼자 움직이기엔… 한국군 내부 일은 한계가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규의 대답에 리차드가 기쁜 표정으로 물을 들이켜며 물었다.
“참, 박 병장.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51년생입니다. 왜요?”
“앗, 우리 동갑이네요. 말 놓읍시다. 친구하죠~”
리차드가 웃으며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규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클럽 안의 희미한 조명 아래—두 사람 사이에 작고 묵직한 약속 하나가 놓였다.
세상은 아직 전쟁 중이었지만, 이 테이블 위엔 뜨거운 신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규는 리차드와 악수하면서 김 일병 쪽을 쳐다봤다.
린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매만졌다.
어제보다 멍은 옅어졌지만, 그 자국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날 밤의 흔적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김 일병은 그런 린을 향해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은 조심스러웠다.
아슬아슬하게 손등을 스쳐가다, 린이 살짝 손을 올리자 그제야 살며시 감싸쥐었다.
규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 리차드에게 물었다.
“리차드! 혹시, 클럽 사장이 연루됐으면…”
리차드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누굴 걱정하는지 알아. 적절히 처리할게.”
창밖의 햇살이 테이블을 스쳐 지나갔다.
오후 3시.
하이난 거리 위에 잠시 고요가 깃들었다.
그러나 그 고요는 폭풍 전의 정적이었다.
린의 손등에 남은 멍처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진실들이 그들을 향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