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베트남 닌호아 백마부대>
립스틱클럽에서의 아수라장이 가신 지 이틀째.
기지에는 다시 적막이 깃들었다.
그러나 박규의 눈빛은 전보다 더 매서워졌다.
립스틱클럽 사건 이후, 장춘동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사병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여전히 고삐 풀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린의 뺨을 때리던 그 손으로 김 일병의 뒷통수를 툭툭 쳤다.
"안 죽었냐, 이 일병 새끼야?"
규는 이를 악물었다. 그날 밤, 처참하게 당한 기억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그가 멀쩡히 군내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규는 감찰부대에 보내려던 편지를 찢고, 그 조각을 담뱃불로 태웠다.
그의 직감이 말했다.
“소용없어! 감찰부대도 전두칠이 장악하고 있을 거야”
며칠 후, 장춘동은 연대장실로 호출됐다.
전두칠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춘동이 들어선 뒤에도 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천천히 책상 쪽으로 돌아섰고, 낮게 입을 열었다.
“장 하사.”
“예, 연대장님.”
“내가… 이번에 장군 진급 심사를 받게 됐는데 말야.”
장춘동은 즉시 눈치를 챘다.
전두칠의 눈빛, 망설이는 어조, 짧게 내쉬는 한숨.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연대장님,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사실은 말이야… 전공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 말에 장춘동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건 하늘이… 아니, 무지개가 내려준 기회다.
“연대장님, 그런 일이라면 제가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전두칠은 미소지었다.
“그래? 역시! 장 하사는 화끈해서 좋아.”
연대장실을 나온 장춘동은 곧바로 특별외출을 신청했고, 몇 시간 뒤 립스틱클럽 구석에서 클럽 사장과 마주했다.
사장은 그가 오래 전부터 관리해 온 커넥션의 하수인이었다.
“무기 좀 구해. AK 계열로, 가능한 많이…”
사장은 수첩을 꺼내 적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이십니까?”
장춘동은 씨익 웃었다.
“공적 하나 만들어 드리는 거지. 우리 연대장님께.”
클럽 사장을 통해 무기상에게서 사들인 무기들은 곧바로 밀림의 한 장소로 운반됐다.
그리고 장춘동은 기습작전보고서를 작성했다.
베트콩 진지를 습격해 전투 끝에 무기를 노획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전두칠은 보고서를 손에 쥐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이거야. 아주 좋아.”
그는 장춘동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장춘동은 황홀해했다.
며칠 후, 박규는 리차드 한과의 약속을 위해 다시 립스틱클럽을 찾았다.
시간은 오후 2시. 특별비번을 받아낸 김 일병도 동행했다.
리차드는 클럽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군복 대신 민간인 복장을 한 그는 어딘가 사뭇 달라 보였다.
“왔군요.”
그는 규에게 자리를 권했다. 규는 주위를 살폈다.
낮이라 그런지 클럽 안은 한산했다.
김 일병은 문을 들어서며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린의 모습을 발견하곤, 그 특유의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갔다.
두 사람은 클럽 구석 벽면 낡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린이 가져 온 음료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린씨, 괜찮으신게라?”
김 일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그날 지 땀시 린씨가 봉변을… 정말 죄송혔구만이라… 지가 용기를 더 냈어야 됐는디…”
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로… 그날 김 일병님이 없었으면, 저는…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 일병은 컵을 들어 목을 축이곤, 멋쩍게 말했다.
“부대에선 여그 클럽 야그만 해도 눈치가 보인당께요. 그래도… 린씨를 봉게 안심이 되능구만요.”
린이 살짝 웃었다.
“저도요. 김 일병님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김 일병도 따라 웃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말했다.
“근디… 린 씨, 혹시 만두 좋아하신게라?”
“만두요?”
“예. 지가 음식 중에 만두를 질루 좋아하거들랑요. 근디, 베트남에도 만두 비슷한 거 있지 않은게라? 뭐시더라… 반밧? 바인바오?”
린이 피식 웃었다.
“맞아요, 반밧. 안에 고기랑 계란 들어간 하얀 빵. 저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사 줬어요.”
김 일병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맞구만! 하하… 다음 비번날엔… 지랑 그거 같이 먹으러 가시지라.”
린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김 일병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린은 아버지가 7년 전에 집을 나간 이야기, 어머니와 함께 버틴 날들, 그리고 립스틱클럽에 끌려와 혼자 울던 날들을 조용히 들려주었다.
김 일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고, 고향에 여동생이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린 씨, 우리… 담에도 이렇게 편하게 야그하면 좋겄구만이라. 그냥… 좋은 친구처럼 말이시.”
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끄덕임 속엔, 말보다 더 깊은 공감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