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경치로 점점 무르익어가는 추석즈음에 써보는 글.
집 주변을 걸어본다.
아직 푸른 사과빛인 나뭇잎들 사이에서 다가온 가을 공기를. 이 세상의 공기를. 내가 먼저 핥겠다는 듯 빨간 혀를 드러낸 잎사귀가 나타난다.
그동안 우리는 마치 가챠(캡슐 뽑기) 속에 갇힌 미니어처 인형처럼 그 캡슐 안에 갇힌 옴짝달싹 하지 않는 여름 공기 속에 갇혀있었다.
숨을 쉬고 싶다-고 말해보아도 캡슐 안의 공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무도 우리도 공기도- 그 갇힌 공간 속에서 마른 숨을 뱉으며 흘러내리는 땀과 내면에서 발산해 오는 열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겐 바램이 있었다. 캡슐 속 바깥세상에 나가 바깥공기를 마시는 것. 우리에겐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단지 소박한 바램이 있었다.
이윽고 어느 날부터- 종이에 번지기 시작한 물처럼, 우리에게는 견딜 수 있는 습도와 온도가 찾아왔다. 속수무책으로 아주 빨리 그 공기가 우리 일상에 번져 들어왔다.
우리의 소박한 바램이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초록이 아니었다며. 내 진짜 속내를 내어 보이며 진짜 나를 드러내며, 이 공기를 빠르게 탐했다.
그 결과, 푸른 사과빛 나뭇잎들 사이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던 나뭇잎은 성질이 급한 순서대로 새빨간 혀를 내어놓는다. 손가락이 여러 개인 단풍은 심지어 붉은 손아귀를 펼쳐 양보하지 않겠다고 꼭 쥐고 놓치지 않을거라고 말하였다.
뿐만인가, 이름 모를 알알이 박힌 열매들도 언제는 오렌지색이더니 이제는 대놓고 붉게 익었다. 내가 이만큼 탐스러운 열매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유혹적인 자신을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내어놓았다.
노란 은행잎은 왠지 쓸쓸하다. 은행잎은 빨강이 되기 위한 전력질주로 노랑이 되더니 길가에 수북이 내려앉고 만다. 그러나 나에게도 탐욕이 있다며 열매를 남긴다. 밟으면 너는 내 탐욕의 냄새를 맡을 것이라. 수십 년에 걸쳐, 어쩌면 수천년에 걸쳐,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탐욕의 냄새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라 했던가. 황금빛 보리밭, 추수되기 위해 벼들이 고개를 숙인다 했던가.
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 내가 살아남았다. 내가 이 역경 속에서도 충실한 열매를 맺었다. 그들은 벌크업 하고 벌크업 해 결국은 감당하지 못할 무게가 될 때까지 자신의 근육을 키워냈다. 그토록 탐욕적일 수가 없다. 심지어 햇빛을 받으면 빛나는 골드빛의 광채는 벼의 존재를 숨길수조차 없다.
심지어 보름달도 가장 크게 자신을 밝힌다. 지상에 있는 것들은 내 높이까지 오지도 못한다며 크고 밝은 빛을 발산한다. 심지어 토끼가 떡방아를 찧어도 자신을 보이는데 아무 무리가 없다. 달의 그 과시적인 탐욕적 빛남을 기리며 우리는 추석이라 지내온다.
단풍잎을 비롯 빨간 탐욕이 점점 모든 세상을 뒤덮어 절정에 달할 때- 마치 주식시장 차트의 붉은 장대양봉을 보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듯- 파란 바람이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 탐욕의 끝을 본다. 탐욕의 공기와 탐욕의 경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회색빛 허무함만 남았을 때, 하얀 눈이 내려 그것을 뒤덮고 급기야는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그 모든 것을 투명하게 얼려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새로운 씨앗의 힘이 다시 움을 트겠다고 잠자코 겨울의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탐욕의 끝을 보아왔다.
그래도 탐욕의 시대에 보았던 화려함은. 어쩌면 순진한 욕망의 발산은. 어찌 보면 그리운 풍경이다.
이건 탐욕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