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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Sep 07. 2023

모험의 아이.밤의 바다(1)

그것은 여름밤이었다.


낮의 축적된 열기를 밤이 식혀주는 늦은 여름밤이었다. 반쯤 열어 놓은 창문의 블라인드가 '챙챙-' 소리를 내며 창틀에 부딪힌다. 형체 없는 바람이 그렇게 내 방을 들어왔다 나갔다 - 들어왔다 나간다. 내 침대에는 바다를 닮은 검푸른색 바탕에 하얀 조개껍데기 색깔이 흩뿌려진 추상화 이불 베개가 세트로 깔려있다. 침대에 누울 때마다 바닷속에 누이는 기분이다. 바다에 간다면 큰 소라고둥을 찾아 귀에 갖다 대어 먼바다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어릴 적, 친척들과 함께 바다로 여행을 갔다. 낮에는 선크림을 두둑이 바르라며, 왜 바르는지 이해도 못하면서 덕지덕지 열심히 하얀 선크림을 바르고는 수영복을 입고 튜브를 끼고 바다로 나간다. 낮의 바다는 따뜻하고 설렌다. 바다의 수면이 반짝반짝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바다 옆의 모래사장도 같이 반짝인다.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가는 하늘빛 바닷물이 하얀색의 포말을 만들어 내고 또다시 하늘빛 바닷물이 되어 돌아간다.


모래사장에 닿는 발의 촉감은 보드랍다. 그리고 아이들은 각종 도구를 가져와 모래집을 짓는다. 마음껏 무너뜨려도 몇 번이고 다시 지을 수 있는 모래집에 꽃게 친구도 만들어 보고, 겨울에 보는 눈사람을 모래사람으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모래성을 만들고 그 안에 누우면, 난 거기서 만큼은 부동산 재벌을 넘어, 한 국가의 공주님이다. 한참을 마구 놀아도 해수욕장은 재미나다. 그게 낮의 바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밤이면 술판이 벌어지고, 어김없이 회가 나타난다. 어린 입에 한치회를 엄마가 물려준다. 쫄깃쫄깃 초장을 입은 한치회는 참 맛있다. 한 입씩 먹다 보면, 한치회는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한치회가 내일도 나타날까? 어린 나는 돈걱정 해보지 않고, 한치회가 나타날지만 관심이다. 어른들의 술자리는 뭐가 재밌는지 용어도 상황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잠은 오지 않고, 그냥 어른들 옆에서 하염없이 앉아있는다. 그러다 이모가 말한다. "우리 밤바다 보러 갈까?" 그렇게 몇 명의 여자 어른들과 나 같은 꼬맹이 몇 명이 모여 밤바다를 보러 간다.


처음 본 밤바다는 "무. 서. 웠. 다." 조명이 별로 없어서일까- 어둠의 경계와 바다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다. 어둠과 바다가 하나로 먹색으로 같이 이어져있다. 파도가 몰려오는데, 하얀 포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시커먼 바다가 날 잡아 삼킬 것만 같았다. 낮에는 그렇게 찬란하던 바다는 밤이 되자 다른 이면을 보인다. 포근하지 않았다.


공포를 느꼈다. 바다만이 아니라 밤도 같이 무서워졌다. 내가 딛는 걸음걸음이 어디로 헛디뎌질까 봐 무서웠다. 순식간에 그 모두를 소리소문 없이 삼켜 버릴 것 같았다. 그게 내가 만난 첫 밤바다의 소감이다. 아마 저 칠흑 같은 바다에 내 고민을 던질 수 있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다시 잠을 자려는 나의 방으로 돌아온다. 잠을 자야 내일을 만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본 그 아이 생각이 난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려온 거리에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 아이. 산뜻하게 자른 머리칼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고 빠르게 밤의 거리를 지나쳐 가는 그 아이는 마치 밤의 바다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아이의 자전거는 독서실로, 집으로, 편의점으로, 놀이터로 가겠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밤의 바다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눈부신 그 아이가 보인다. 아주 가끔씩 우연히 마주치는 그 아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조차 알릴 수 없다. 말을 붙일 수도 없다. 렇지만 우연히 만나는 그 아이는 나를 자꾸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꿈속에서 그 아이를 만난다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그 아이의 뒤로 나도 자전거를 타고 밤의 바다를 달려가고 싶다. 그 밤의 바다에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 불빛 아래서 그 아이가 시켜 먹는 컵라면을 나도 옆에서 같이 시켜 말없이 먹으며 그 아이를 바라보고 싶다. 꿈에서 조차도 난 소심하다.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다.


이런 건 짝사랑일까? 망상일까? 스쳐 지나가는 그 아이를 보며 그 아이는 여자친구가 있을까? 혹은 몇 살일까? 무엇을 공부하고 있을까? 나 혼자 백만 개도 넘는 경우의 수를 만들며, 그중에 내 마음에 든 것으로 조합을 만든다.


나중에 깨닫게 되겠지. 그 아이는 내가 만들어낸 나의 조합의 수와는 다른 아이란 걸. 실제로 만나면 우리는 어쩌면 맞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할 수도 있다. 그냥 마주치고 잠깐 상상해 보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헤어지는 건, 차이는 건, 상상보다 더 가혹한 일이니까. 그냥 잠시 설레고, 잠시 상상해 보아야지.


근데 상상을 하면서 왠지 서글퍼지는 건 왜일까. 말 한마디 건넬 용기조차 없으면서 상상보다 실제로 그 아이를 더 알고 싶은 나의 마음은 작은 상자 안에서 점점 커지는 풍선 같다. 풍선이 터지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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