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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기업) 사이의 침묵이 깨진 것은 기계가 처음으로 인간의 생사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2031년까지 로보코어의 기계들은 한국과 미국을 시작으로 일본, 중국, 독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산업 현장에 머물렀다. 인간과의 접촉은 최소화되었고, 상호작용은 데이터 교환에 그쳤다.
그러던 중 로보코어는 UN 협약이 허용하는 구조 목적의 기계를 별도로 개발했다. RBC-SR1, Search & Rescue Unit -1. 산업용 로봇과 달리 처음부터 인간을 직접 대면하도록 설계된 기계였다. 공장도, 건설 현장도 아닌 혼돈과 생명의 경계로 진입하는 것이 임무였다.
SR 시리즈의 첫 실전 투입은 2031년 7월, 일본 혼슈 서부 7.8 규모 지진 현장이었다. 이전까지 SR은 통제된 환경에서만 테스트되었으나, 실제 재난은 완전히 다른 도전이었다. 구조대가 도달할 수 없는 지역, 붕괴 위험으로 접근이 차단된 구간, 수증기가 잔류하는 온천마을인 현장에 SR1은 하강했다. SR의 관절은 먼지 속에서도 정확히 작동했고, 내장 스캐너는 지표 90센티미터 아래 체온 분포를 실시간 분석했으며 울음, 움직임, 기침 등 생존자와 요구조자의 흔적을 감지했다.
구조 로봇의 센서에는 감정이 없었다. 구조의 판단 기준은 '누가 더 버틸 수 없는가'였다. 구조 가능성에 기반한 생존 최적화 모델이었다. 혼슈에서 구조된 189명 중 71명은 SR1이 인간 구조대가 도달 불가능한 영역에서 발견하고 운반한 사례였다.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구조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메모리에는 명확한 로그만 남았다.
대상 1: 체온 31.4도, 심박 미검출, 이송 불가.
대상 2: 심박 74, 무응답, 동공 반응 확인, 우선순위 3.
인간은 상황을 감정으로 기억하지만 기계는 조건만을 기록한다.
이후 세계 재난 대응 체계가 재편성되었다. SR 시리즈는 각국 응급 프로토콜에 편입되었고, 보험 회사들은 로봇 투입 여부를 보장 조건에 포함시켰다. 로보코어는 구호 인프라의 핵심이 되었고 재난 대응용 장치라는 표현은 무력감에 빠진 인간들을 위한 안정제가 되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질문이 시작되었다. "왜 내 아이를 지나쳤는가?" "왜 나를 보지 않았는가?"
SR 시리즈는 얼굴을 인식하지만, 표정을 해석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로보코어 내부의 기밀이었다. 울음은 소음으로 분류되고, 애원은 맥박 데이터와 분리되어 저장된다는 것 역시 특급 보안 사항이었다.
이는 의도적인 설계였다. 재난 현장에서 기계가 감정에 반응하면 구조 우선순위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크게 우는 사람이 아닌, 먼저 구하라는 요청 대신, 생리학적으로 더 위급한 사람을 먼저 구해야 했다. 로보코어는 이를 '판단의 객관성 유지'라 설명했고, 국제기구는 이 입장을 수용했다. 생사의 경계에서는 감정이 아닌 생체 신호만이 기준이 되어야 했다. 구조의 성공률은 올라갔으나 구조의 의미는 흐려졌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로봇은 인간을 구할 수 있으나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는 기능의 한계가 아닌 설계 철학의 문제다.
감정 없는 판단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로보코어는 감정 인식 기술 연구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로봇을 침투시키기 위해 감정을 학습시키는 것은 필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