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을 내보고 싶다

0.3 / 1113

by 크게슬기롭다

아침에 일어나 유튜브로 자기계발과 관련된 영상을 다양하게 틀어놓고 생활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열심히 들으면 내가 바뀌어서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한 결과 얻은 것들이 많았다. 경험을 더 많이 했다. 더 많이 표현하려고 하고,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치지 않으려고 했다. 체력이 없어지는 어느 시점엔 분명 아무것도 하기 싫을 테니, 지금 정신이 멀쩡하고 원하는 만큼 내 체력을 사용할 수 있을 때 많이 써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양하게 시도하고, 어쩔수 없이 끝을 내고, 내가 원하는 모양새로 매듭을 지어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했다가 그만둔 것을 다시 들쑤시기를 반복했다.


실패 때문일까, 반복되는 잦은 실패, 남들이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들을 직면할 때 마다 계속해서 무너진다. 그게 계속 번져와 이젠 ‘유튜브를 보는 나’ 에게도 넘어왔다. 이렇게 계속해서 몇개월동안 보면서 생활해도 내 삶에서 가장 크게 얻고 싶었던 것의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눈 앞에 가려진 벽이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다.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 속으로 내가 빠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30930_2.jpg 거대한 벽에는 실금이 나있고, 벽 앞엔 아주 작은 사람이 하나 서서 벽을 관찰하고 있다. / 빙 / DALL E


다행인 건, 실금들이 조금씩 보이기 한다는 것이다. 예전엔 그런 ‘변화의 가능성’ 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대로 계속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눈깔’을 제대로 뜨고 벽을 면밀하게 살펴보니 아주 작은 실금정도는 나있는 것 같다. 다만 내 손엔 그 실금을 파낼 삽이나 기타 드릴같은 도구들이 없다. 그리고 어떤 실금을 파야 이 벽이 무너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 실금이 ‘파인 깊이’ 를 알고 싶단 생각을 매번 했는데 알지를 못하겠다. 미래의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다’ 라고 믿고 하나를 골라 깊게 퉁퉁 파내려고 할 뿐이다.


그 깊이는 감정을 신호로 삼고 나의 생각을 관찰할 때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분노의 감정같이 크고 강렬한 것들이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 내 결핍을 깊게 건드려주면 줄 수록 나는 그 깊이와 방향을 쉽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어떤 삶이 부러워지면 그 상태에서 내게 질문한다. ‘나는 왜 저게 부럽지? 안부러울 수도 있는데 왜 저 <누군가> 의 <어떤 삶> 이 부러운걸까. 내가 저 <누군가>를 부러워하는건가, <어떤 삶>을 흉내내고 싶어하는건가? 누군가가 되고 싶은 부분을 한번 더 자세하게 나열해본다. 그의 외모적인 측면일 수도 있다. 그보다 사회성이나 능력이 조금더 눈에 간다. 어떻게 하면 저런 말과 제스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놀란다. 손 끝에서 시작하는 그의 능력이 그림으로, 글로 쓰여질 땐 감동도 받는다. ‘저걸 저렇게… 할 수 있다고? 저 손끝엔 요정이 사는건가’ 라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친다. 게다가 그렇게 사는 <누군가> 의 어떤삶에서 ‘평온한 순간’을 발견하면 그 또한 새로운 탐색 대상이다. 내가 고군분투 해서 얻어낸 ‘순간’ 이 타인의 ‘일상’ 일 수록, 그러니까 그 격차가 눈에 띌 수록 나는 그 탐색 대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를 바라보는게 결국, 내 마음 속 열망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끝엔 분명, ‘실금의 깊이’를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금을 계속 파다보면 구멍이 될 것이다.


구멍을 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할머니의 스크랩 #1 손에는 오장육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