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본 만화, <카드캡터 체리>에 매번 나오던 대사다. 주인공 체리는 주변에 엄습한(?) 어떤 기운을 느낀다. 보통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거나, 의도치 않은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가끔 귀여운 요소들도 나타난다. 카드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름을 갖고 있고, 체리는 그들의 이름을 찾는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발견하여 ‘정체를 알아낸 다음’ 그들의 힘을 빼고 그 힘을 작은 카드에 봉인해 버린다.
나는 이 비유를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두려움’ 도 그 정체를 알면 바로 봉인해 버릴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아니었다.
몇 겹의 거대한 막으로 되어있었기에, 아무리 ‘두려운 이유’를 찾아내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와 자기 공개를 통해 그 두려움들을 깨부수곤 했지만 핵심에 다다르지도 못했었다. 스스로 그걸 하나씩 부술 때마다, 카드캡터 체리의 관점에서 ‘이름을 발견해 정체를 알아낸’ 순간 나는 희열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내가 갖고 있던 두려움이라는 존재를 점점 장악해 나가는 즐거움도 느꼈다. 좀 더 원초적으로도 즐거웠다. 내가 가진 두려움을 이겨냈다는 것이 그랬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이상했다.
최초의 불안은 아마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발표불안 비슷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학년 음악 수업 첫 시간이었다. 나는 그 당시 배우던 하모니카를 들고나갔다. 아쉽게도 그때 배우던 노래는 이별에 관련된 노래였다. 내가 배우고 외운곡은 그뿐이라, 첫 수업인데도 불구하고 ‘헤어짐’을 연주한 것이다. 그 연주가 다 끝나자 한 친구가 그 곡에 대해 비웃었다. 나는 악다구니를 썼다. ‘내가 절대로 너 앞에서는 다신 하모니카 연주 하나 봐라!’ 그러고 나서 그 하모니카 연주는 앞에 나가 몇 번 더 했지만 다른 청중들이 내게 하는 어떤 비판, 비난에 대해 굉장히 민감해했다. 차라리 앞에 나가 전시가 되면 됐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영 힘들었다. 그 난감함은 중-고등학생땐 잠잠했다가 대학교 발표수업에서 잔뜩 터져댔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진 상황을 몇 십 번 겪어댔다. 동아리에서도 그건 해결되지 못했다.
더 큰 성인이 되어서 발표 수업을 듣고, 발음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안정되는 나를 발견했다. 아침에 일어나 매일 30분씩 발음교정을 해주는 온라인 강의도 들었었다. 원고를 만들어도 자꾸만 떨리는 나는 ‘줌 미팅’을 위주로 발표를 시작했다. 내가 틀리고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수많은 리스너들 사이에서 대답도 못한 채 부끄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큰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질문을 다 방어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고 체념했다. 모르면 다음번에 찾아오겠다는 멘트를 준비해서 나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그 문장을 뱉는 나도 부끄러웠다. 자꾸만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모자란 존재’라는 걸 내 입으로 시인하는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 두려움도 ‘단번에’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는 100% 실패했다고만 생각해 왔다. 아니었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나서 끊임없이 패배했다.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았지만 매번 느꼈다. 돌처럼 굳었다. 혓바닥이 굳는 느낌도, 머리가 돌지 않아 속상한 느낌도 몇 십 번 겪었다. 왜 쇼미 더머니에 출연한 래퍼들이 그렇게 랩을 절어대는지도 알았다. (절지 않는 래퍼들의 멘털을 이식받고 싶을 정도였다) 왜 다들 뚝딱거리는 로봇이 되는지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카드캡터체리를 보았다. 체리도 수많은 카드들을 모으는 ‘카드모음집’ 같은 걸 갖고 있었다. 아마 나의 두려움은 카드 한 장이 아니라 한 묶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그 카드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쌓을 뿐이다. 여전히 어디선가 그 ‘두려움’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나만의 카드집을 다 채울 때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