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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100back2

지유의 치유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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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 책을 회사에서 발견했다. 퇴근길에 조금씩 읽었다. 내 머릿속 지유와 유나는 때론 강렬하게 상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흩어졌다. 내가 지하철에 의자에 가만히 앉아 읽을 때는 선명하게, 그리고 이동하면서 잠깐 곱씹을 때는 다시 흐릿하게 흩어졌다. 아직 나는 지유가 어떻게 해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지, 그리고 행복을 찾았는지 여부를 알고 있지 않다.


다만, 지유를 바라볼 때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상하고 약간 과도하게 통제하는' 사람인 엄마를 둔 어린아이인 그녀의 상태를 마치 당사자인 것처럼 써 내려가는 작가에게도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적이 있었느냐고, 혹은 그런 경험을 한 가까운 사람을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그렇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나르시시스트'를 참 잘 표현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휘둘려서 어쩔 수 없이 애착형성이 잘 되지 않을 (예정인) 어린이의 마음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다니, 이건 누군가가 옆에서 들려주거나 알려줘선 묘사할 수 없는 수준이다.


자기만의 삶의 방법이 있는 것은 꽤 존중받을 일이다. 소설 속 유나의 모습이 그렇다.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지 잘 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 '센스'가 있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자기 자식뿐 아니라 시댁 (어머니) 및 남편 (은호) 등을 대하는 법에도 통달했다. 문제는 그런 '자기만의 삶'을 타인에게 들이밀었을 때 발생한다. 타인이 그녀의 법칙을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 이슈는 커진다. 다시 말해, 지유와 유나 사이에 가장 큰 골이 있으며 지유는 평생 자기의 삶을 바쳐 자기 엄마의 잘못된 행태에서 온 '습관적 패턴'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그 삶의 방식은 '유나의 방법'이지 '지유의 것' 이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설을 읽으며) 내가 알던 유나는 그걸 벗어나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속에서 '더 좋은, 똘똘한' 선택을 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기 코끼리 발에 끈을 묶어두고 풀리지 않게 두면, 그 코끼리는 몸집이 다 자란 다음에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 그들이 스스로를 옥죄게 하기 위해서는, 조련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끈을 당기는 행위를 하기만 해도 철저하게 처벌을 하는 것이다. 마치 끈을 당긴다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리법칙이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금기를 벗어나지도 못하게 반복적으로' 학습을 시키면, 코끼리는 그 줄을 당겨버리는 금기를 깨버릴 시도 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지유는 딱 그 상태이다. 아예 당기고 , 깨버리고, 도망가는 방법 자체를 잃어버린 <넋이 나간> 좀비 같은 삶을 아주 어릴 때부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세계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스스로는 너무 의아할 것이다. 충분히 자기 자신은 '더 나은 상황을 위한 선택'을 해왔지만 타인의 눈에서는 그저 수동적인 사람이 된 것을 말이다.


이 소설의 끝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지유가 정말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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