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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100back2

아니 에르노 따라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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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정말 미세한 소리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듣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어제 운동을 가겠다고 옷을 갈아입고 강변으로 향했다. 날씨가 꽤 쌀쌀해져서 입고 나온 겉옷을 벗지도 않은 채 달리기를 시작했다. 왼쪽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 보다, 오른쪽 출구를 향해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더 많던 시간 대였던 게 분명하다. 집에 갈 시간, 나는 그 시간에 강을 따라 달리기를 시작했다. 에르노의 소설 때문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각자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모여있는 사람들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더욱, 어제 소설이 머리와 마음을 스쳐갔다.


달리기 시작한 지 5분은 지났을까, '오른쪽 출구'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지점이다. 어제그저께의 서사보다, 지금 여기 일분일초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구간이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빗방울이 몇 개 떨어지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더 가야 했던 나는 그 방울들을 무시하고 달려 나갔다. 1분은 빠르고 강하게, 그다음 1분은 천천히 움직여야 했던 내게 '비 때문에 멈추는'건 없었다. 계속 달려 나갔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면서 나 자신도 '어제그저께'에서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넘어온 듯한 느낌이 사뭇 좋았기 때문이었다. 쳐져 있거나 매여있지 않은 느낌, 그게 좋았다. 그러나 그 느낌을 쫓아 달리면 달릴수록 비구름은 점점 강해졌다. 결국 내 옷은 잔뜩 빗물에 젖어들어갔다. 머리까지 흠뻑 젖었지만 몇 분을 더 뛰었다. 반환점이 나오길 기다리며 움직이던 내 발은 결국 멈췄다. 그대로 돌았다. 오른쪽 출구, 그러니까 나도 이젠 '어제그저께'를 향해 뛰기로 결심했다. 비가 너무 거셌기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두 귀에 꽂은 노랫소리에 맞춰 하나 둘 움직였다.


갑자기 왼쪽 이어폰이 움직였다. 그리고선 빠져버렸다. 그곳은 강변 옆 산책로였다. 비는 잔뜩 오고 있었고, 불빛은 저 멀리 가로등 하나가 전부였다. 저 멀리 도로를 향해 비추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이어폰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고 이어폰 찾기 버튼을 눌렀다. 다행이었던 건 이어폰과 연결이 되어있다면 그 잃어버린 것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몇 번 눌러댔더니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빅 거리는 소리, 그 소리는 자꾸만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어딘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변 둑에 서서 귀를 대보았다. 소리가 그렇게 크진 않았다. 그 반대쪽 귀를 막고선 다시 버튼을 눌렀다. 아주 미세하게 어떤 소리가 들리긴 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들리지 않았다. 도로에 차가 지나가도 그 소리는 바로 묻혔다. 옅은 빗방울도 큰 소리를 낼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소리들 때문에 이어폰에서 나는 소리를, 정말 하나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이렇게 미세한 소리를 찾으려 한 적이 있었던가, 싶어 허탈한 웃음이 났다. 최근 들어 자꾸만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상상하지도 못했다. 비에 젖은 몸과 머리칼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이어폰의 위치는 달라졌다. 내가 지금 서있는 곳 보다 앞으로, 또는 뒤에 있다는 신호를 받았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몇 번을 '포기할까' 란 생각으로 돌아다녔다. 찾게만 해주신다면 제가 다 잘하겠습니다, 류의 거래 제안을 마음속 신에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같은 자리를 돌았다. '어제그저께'도 '오늘 지금'도 아닌 어떤 곳에서 맴돌고 있던 것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지만 '강물에 떨어졌다는 강력한 증거' 라도 찾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종종 대다 핸드폰의 신호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연결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왼쪽 이어폰이 내 핸드폰과 연결이 된 것이었다. 이 주변, 그러니까 여기 어딘가엔 반드시 있단 이야기였다. 강물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왼쪽 이어폰이 떨어졌으니 당연히 왼쪽으로 튕겨져 나갔을 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어폰은 오른 땅바닥에 있었다. 정말 소중하게 찾은 이어폰이었다. 모든 '잘못된' 경우의 수들이 해소되었다. 사라져 버렸다. 손에는 오직 '지금 찾은 이것'만 남아있었다. 그것을 갖고 나도 다시 '오른쪽 출구'를 향해 걸었다. 수많은 '어제그저께' 들과 같은 방향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련이 없었다. 빗 속 그 고난 속에서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찾아냈던 이어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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