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되는 와중에 무언가는 좀, 뭉쳐졌으면 / 1851
계속해서 앞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내 입으로 했고 남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으면 더 반갑게 찾아가기도 했다. 좀 더 확실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앞서나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찾기 쉬웠다. 그래서인가 유튜브에 대한 이야기도 꽤 많이 썼다. 소설 주제로도 많이 넣곤 했다.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유튜브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나 보다’라고 말을 내게 해줄 정도였다. 그랬다. 사실 맞았다.
이런 나의 모습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꽤 만났다. ‘노력한다’ ‘힘들겠다' 며 나의 노력을 긍정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 감사했다. 당연하게 해야 한다고 여기던 삶의 어떤 모양에, 나 자신보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 줬기 때문이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가는 것, 운동 전에 일찍 일어나는 것조차 내게 박수를 보내왔다. 주말에도 ‘무엇을 더 만들어야 한다’ 며 컴페티션에 참석하거나 스터디에 참가하는 것도 응원해 주었다. 그들의 응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그 응원을 들을 만큼 열심히 하고 있나 싶어 조금 쪼그라들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 쪼그라든 내 속에는 그들의 응원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만하고 조금 쉬어라'는 이야기도 몇 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땐 답답한 느낌도 들었다. 쉰다고 지금 내 앞에 닥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 쉬면 그 공간에 머물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가끔은 그 ‘쉬어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콘텐츠들이 밉기까지 했다. 그 공간에 다다르고 싶은 나 자신을 달콤한 말로 방해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상태인 나를 스스로 마주하자 드디어 인정했다. 나는 그들의 말 대로 ‘쉼’ 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내 기준) 가만히 쉬었다. 예전 같으면 조금 더 힘들게 매달릴 만한 문제도 조금 빨리 손을 놓아버렸다. 그 문제를 풀어버린 게 아니라 포기한 것이었다.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조금씩 태도가 바뀌어갔다. 더 이상 고통을 당연스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체감했기 때문이다. 운동할 때도 조금 더 가볍고 쉬운 무게를 선택했다. 집중해서 풀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기보다, 저 문제가 어렵다며 멀리했다. 심지어 초록불이 반 정도 남아있는 신호등을 보고서도 뛰지 않았다. 다음번에 건너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숨차게 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고 싶다는 본능은, 그리고 그 본능을 허락한 내 이성을 압도했다. ‘나만의 규율’ 같았던 루틴은 탕후루 설탕 껍질처럼 쉽게 부서졌다. 삶의 많은 것들을 그렇게 포기-인정 사이클에 빨려 들어가 계속해서 더 많은 포기와 인정이라는 상태를 찍어냈다. 재활용 플라스틱을 잔뜩 모아 아주 얇은 실 플라스틱을 만들 듯, 나의 과거 껍질들은 더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속도를 막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좀 알려줘> 상태로 살아왔다. 좀 알만하다 싶으면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돌아왔다. 쉬지 못하는 상태에서 ‘쉬어도 되는 상태’로 바뀌는 순간의 나는 인생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도 받았다. 그러나 그 상태에 조금 더 머물러 있어 보니 다시 나의 상태는 똑같아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상태로 바뀐 것이다. 이 질문을 또, 계속해서 해체 중인 내게 던진다. 해체되는 와중에 무언가는 좀, 뭉쳐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