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의 다음은 누구인가. 알파벳이 한 바퀴 돌아 처음으로 돌아 A로 시작하는, A세대가 어떨까.
더 정확하게는, AI와 함께 성장을 하고 학습을 하고 자기의 일상을 살아오기 시작한 세대들을 칭하고자 했다. 그들을 지칭하는 이름에 AI와 관련된 이름이 단어가 생각한다. 2034년엔 아기를 낳고 양육하는 사람들은 유튜브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기계들에 AI가 탑재되고, 단순히 말을 할 줄 아는 프로그램을 넘어 그 아이의 감정을 대신해서 읽어주고 눈을 맞춰 대답해 주는 존재들이 생겨날 것이다. 컴퓨터 화면으로만 구현되진 않을 것이다. 인형부터 장난감, 베개나 이불들에도 아주 작고 미세한 AI센서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의 뒤척임, 잠꼬대를 정보로 수집하고 분석하여 ‘더 나은 상태’를 만들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심리를 자극한 다양한 제품들이 나올지 모른다.
챗 지피티와 함께 태어난 아이들은 어떨까. 10년 후 10살 초등학생들은 이전 10살들 보다 더 많은 일들을 AI와 함께 할 것이다. 이미 그들은 ‘왜?’ 시즌을 AI와 함께 했기 때문에 지난 인류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하늘은 파래? 왜 버스는 저렇게 빨리 가?’라는 질문에 지치지 않고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난 첫 세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호기심을 끊임없이 충족하고, 더 편견 없이 현상을 접한 아이들의 뇌는 조금 더 비정상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왜?라는 질문에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응대’ 받았던 과거의 인류 속에서는 ‘어린 시절에 어른만큼 성공한’ 천재들의 수가 굉장히 적었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이 충족되고, 끊임없이 생각의 전환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들이 등장하자, 인류는 또다시 AI보다 더 폭발적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학습방법은 이전 세대의 사람들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직접 ‘눈’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처리하여 머리에 넣고자 했던 방식이 아니다. 말과 귀로 습득하고 처리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 ‘말’이 정확하지 않아도 문제없다. ‘왜?’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존재 역시, 함께 그 상황과 맥락을 인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안경이든, 목걸이든 뭐든 제3의 눈 역할을 해줄 것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에 맞는 학습서가 생기고, 새로운 ‘학습 군단’ (더 이상 칠판 앞 강의자 - 의자 위 학생 형태가 아닌) 이 생길 수 있다.
자기의 호기심을 순간순간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할 까?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참을성은 더 떨어질 것이다. 그들이 가진 ‘호기심’이라는 감정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클릭하면 바로 배송을 받을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에 익숙해진 우리를 떠올려본다면 상상하기 더욱 쉬울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질문을, 그것도 (인터넷이 연결되면) 몇 초만에 답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답을 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답답함을 더욱 빨리 느낄 것이다. 더 빠른 답을 찾고자 할 것이고, 그 답이 설령 길어져 단번에 습득하기 어려운 양이된다면 그 내용을 요약해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인간의 뇌는, 기계가 학습된 것에 다시 반응하며 강화될 것이다. 조금 더 낮은 인내력을 가진 존재로 말이다.
호기심을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들은 더 많은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높을 수 있다. 우선 낯선 것에 대한 반응 속도는 ‘어린 시절’ 수준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을 할수록 사람들은 상황이 자신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들과 함께 하게 된다. 익숙함에서 오는 비개방성은 이전 세대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A세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핍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궁금증을 AI를 통해 채웠다. 시간이 많이 들지도 않는 일들로 인해 한계를 모른 채 살아왔다.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원시시대의 DNA가 드디어 없어질 기회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저 멀리 ‘저게 뭐야?’라고 물어보고, 그 답을 듣고 동하는 것이다.
무조건적 거부, 무의식적 반항은 줄어들 수 있다. 한번씩 일단 ‘맛보고 시작’ 하려는 습성이 더 강해진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 그러나 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는 것만큼, 자신의 ‘질문목록’을 올려 공유할지도. 그럼 그 질문목록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도 —
그리고 그다음은? 그럼 그들은 앞으로 인간을 어떻게 사귈까? 인간과 친근하려고 할까? 낮은 인내력과 높은 개방성을 가진 이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그리고 그 모습이 설령 사회와 맞지 않더라도, 그게 더 이상 문제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미셸 푸코 <정신병과 심리학>에서 는 정신병 진단을 사회적 규범에 따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럽 사회의 모순된 시선이 어떤 특정인의 행동을 ‘미친 인간’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그들이 ‘이상하다’라고 보기 때문에 정신병이 있다고 판단한다는 말, 이를 미루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제 보통 사람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낮은 인내력과 높은 개방성의 수준이 2024년 기준에서야 ‘낮고 높은’ 상태일 뿐,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들이 그렇게 생겨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보며 우리는, 다음 먹거리를 또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