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손님은 둘이었다.
과거에 우리들은 다 잘 먹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함께 만나 먹은 음식은 ‘그 시점에 어떤 곳에서 유행하는’ 것이었다. A의 취향이나 B의 취향, 혹은 나의 호불호가 포함된 음식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먹었을 때 맛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도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는 점에서 막연한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었다. 음식과 함께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취향이 담긴 음식으로 선택했다. 검색 결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메뉴, 너무나 먹어보고 싶고 만들어보고 싶던 음식을 하나 찾았다. 에그 인 헬을 응용한 <미트 인 헬>이었다. 이때 까진 몰랐다. 이 메뉴가 내게 HELL을 가져다 줄은 몰랐다.
먼저, '미트' 를 위해 한돈 앞다리살을 샀다. 그리고 김치 조금, 부추 조금, 양파 1개, 버섯 1개, 토마토 주먹보다 좀 작은 것 8개, 소시지도 한 세트를 샀다. 하나 씩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레시피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양파와 부추, 버섯을 잘게 다져놓기까진 문제없었다. 다진 고기와 섞어 한 덩이의 미트볼 형태를 만드는 이 단계가 문제였다. 나는 한돈 앞다리 살을 사서 가위로 자르고 칼로 다지면 다져질 줄 알았(?) 다. 한번 도 해보지 않은 초보자의 용기였다. 마침 다진 고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호기심,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그 상황이 환장의 콜라보를 만들었다. 먼저 가위로 열심히 한돈 앞다리 살을 잘랐다. 내가 자를 수 있는 한 가장 작게 잘랐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로 그들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아무리 다진다고 해도 그들은 넓게 펴지기만 할 뿐, 양파처럼 다져지지 않았다. 레시피 속 다진 고기들의 생김새와 많이 달랐다. 허허 다시 또 레시피를 따르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인가, 싶어 절망을 하려던 중 도깨비방망이가 생각났다.
도깨비방망이!
홈쇼핑에서 모든 것을 갈아버릴 수 있다고 광고하던 그 제품 아닌가. 물을 조금 넣고 앞다리살을 갈기 시작했다. 모터가 열을 받는 듯하여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1시간 동안 만들 수 있기를 바랐던 나의 꿈이 무너졌다. 다지지 않은 고기를 가져와 다질 수 있다고 상상한 과거의 나를 잠깐 불러 세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주어진 내 손의 ‘가위질된 고기’를 다져버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꺼진 도깨비방망이를 다시 들고 열심히 고기를 갈았다. 비계가 중간에 껴서 칼날을 몇 번 씻었다. 비계는 갈리지도 않고 질기게도 칼날에 붙어있었다. 돌돌 말려있어 도깨비 방망이를 멈추고 몇 번을 씻어내야 했다. 그 짓을 반복하고 나서야 미트볼을 만들 만한 '다져진 고기' 형태가 되었다.
'헬'은 내게 어올리는 말이었다.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들은 너무 수월했다. 미트볼을 만들고 프라이팬에 초벌구이까지 마쳤다. 냄비를 하나 꺼내 다진 마늘을 두르고, 그 위에 소시지를 올려 살짝 구웠다. <에그 인 헬>처럼 토마토소스도 필요했다. 토마토를 꺼내 익히고 껍질을 벗기고, 설탕과 소금을 넣고 끓여 만드는 과정도 참으로 쉬웠다. 그 토마토소스 1.5컵과 물 1컵을, 미리 준비해둔 재료가 담긴 냄비에 부었다. 그리고 아까 만든 미트볼을 넣고 5분, 날계란을 꺼내 반숙 수준으로 만들고 포일로 잠시 덮어 3분을 기다렸다. 드디어 완성.
두 번째 손님들은 내가 미트볼을 만들고 나서 초벌구이를 할 때 즈음에 도착했다. 모든 음식이 완료되기까지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나는 주방에서, 그들은 식탁 주변에 둘러앉아 자신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최근에 들어간 회사는 어떻고, 오늘 보고 온 동료는 어떻고… 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 삼아 요리했다. 가끔 내가 껴들어가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면, 싱크대에서도 고개를 돌려 그들의 대화에 끼기도 했다. 누구는 조금 살만하다고 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또 다른 누구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도움을 주지만,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동료도 있다고 했다. 그 동료의 실수까지 내가 책임감을 갖고 도와주는 게 맞는 건지 헷갈린다며 물어오기도 했다. 상상하던 하루와 비슷하게, 또는 더 나은 수준으로 흘러가면 ‘살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상상하던 일만큼 흘러가지 않으면 ‘해볼 만하지 않은’ 삶을 산다고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걱정거리는 하나로 모아졌다. 쉬운 길이 있는데 그 쉬운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맞다’ 고 판단 내린 그 옆의 길을 택할 것인지 말이다. 나의 고민은 타인의 눈으로 보면 ‘쉬운 길과 그렇지 않은 길’로 나눠질 뿐이다. 그들의 고민도 같았다. 더 쉬운, 안 해도 되는, 굳이 할 필요 없는 길이 있었고, 그 옆엔 자기 스스로 ‘해보고 싶은’ 행동 패턴이 있었다.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리 잡은 행동 패턴 말이다. 그들의 걱정거리만 듣던 그 순간엔 ‘그들과 내 고민 사이의 거리감’ 이 느껴졌었다. 한번 더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그들 역시 (타인의 눈에서) 쉬운 길과, (자신의 눈에서) 해야 하는 길 중에 선택해야 했다. 문득 한돈 앞다리 살을 가위로 자르고 칼로 다져보려고 했던 나를 떠올렸다. 한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도전하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고 판단하고 싶어 하는 것이 참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다시 만나면 그들에게도 묻고 싶다. 자신의 미트볼을 위해 어떤 고기를 살것인가, 하고